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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사람 향기나는 새해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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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옛날 어떤 게으름뱅이가 살았다. 그 게으름뱅이가 섣달 그믐날 산에 가서 한참 나무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사람 소리가 들려 왔다. "섣달 그믐날 나무 하는 놈은 내 아들놈!" 하는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또 그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그때 또 "섣달 그믐날 나무 하는 놈은 내 아들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으름뱅이는 하는 수 없이 빈 지게를 짊어지고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섣달 그믐에 나무를 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 이렇게 "내 아들놈"이라고 욕 중에서 가장 큰 욕으로 큰 모욕을 주었다. 섣달 그믐까지 여름 동안 땔 나무도 준비 안 해 놓고 무엇을 했느냐는 동네 사람들의 욕이었다. 섣달 그믐까지는 일년 동안의 모든 일을 잘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섣달 그믐이 되면 동네 어른들은 사랑방에 모여 풍물 악기들을 손보고 다듬었다. 소고도 다시 만들고, 장구도 고쳐 메고, 징과 꽹과리도 새로 손을 보았다. 섣달 그믐밤에 동네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설과 정월대보름까지 마을 지신밟기와 농악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설 음식을 만드느라 집집이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가고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 저기 분주한데, 동네 사랑방이 있는 집에서는 굿을 맞추어 보느라 굿소리가 쿵쿵 울려 퍼졌던 것이다. 집안 곳곳에 푸짐하게 쌓여 가는 떡과 과자와 많은 음식과 일년에 두 번씩, 설과 추석밖에 사지 않은 새 옷을 고이 간직해 둔 섣달 그믐이야말로 사람들에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부푼 날이었다. 굿에 칠 악기를 다 손 본 어른들은 목욕을 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동네에서 제일 큰 당산나무에 가서 당산제를 지냈다. 당산제를 지내면 동네는 이제 고요 속에 빠져든다. 일년 중에 가장 먹빛 같이 어두운 섣달 그믐밤의 어둠은 지난해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묻어버릴 어둠이며 가장 빛나는 새날 새해를 잉태하기 위한 어둠이다.

드디어 새 아침이 밝았다. 동네는 조용하기만 하다. 집 안에서는 차례가 진행되고,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일년 중에 제일 깨끗한 모습으로 마을 길을 나선다. 하얗게 깔린 서리를 밟으며 마을 길에 나서면 마을 뒷산에서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까치가 울었다.

일년 중 가장 많이 노는 명절이 설이다. 추석은 닷새를 놀지만, 농번기와 추석이 겹치면 놀 날이 많지 않다. 대보름에도 닷새를 놀지만 음식과 신명이 다 가고, 일 철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설 열흘만이 가장 마음 편하게 노는 날이다. 새 옷과 푸짐한 음식, 그리고 고된 노동으로부터 풀려난 사람들은 설 초사흘이 지나면 마을 축제 속으로 들어선다. 어머니들은 어머니들끼리 모여 놀고, 처녀.총각들은 또 처녀.총각들끼리 골방을 찾아가 놀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놀았다. 마을 전체가 커다란 축제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노는 굿판이 벌어진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전혀 간섭받지 않은 작은 그 마을만의 독립된 설 축제 현장은 지금 생각하면 전설 같은 천국이었다. 고된 일과, 헐벗음, 그리고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난 아름답고도 장엄했던 작은 마을들의 이 해방 공간은 또 새로운 해를 앞둔 마을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삶의 축제였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가장 힘들 것 같은, 정신을 바짝 가다듬어야 할 것 같은 새로운 결단의 새해가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 갈가리 찢어지고, 세상 그 어디에다가 쓰려야 쓸 데가 없을 것 같은 갈등과 파편화되어 버린 우리 사회의 참담한 분열이 현실 앞에 또 떠올랐다. 조금 못 살아도 좋다. 정직과 진실이 통하는 인간다운 삶,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울리는 품격 있는 사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향기가 나는 사회를 한번 만들자. 우리가 두고 떠난 가난한 마을 당산나무는 지금도 거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지 않으냐.

김용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