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씨 '사랑의 심포니'… 기립박수 10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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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정명훈(피아노 연주자)씨와 아들 민(지휘자)씨가 21일 오후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초청 자선음악회'를 갖기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사진=안성식 기자]

객석의 기립박수는 10분 가까이 이어졌다. 늘 엄숙한 표정이던 '마에스트로' 정명훈(54.서울시향 상임지휘자)씨는 오케스트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어 주먹을 불끈 쥐며 "브라보"를 외쳤다. 소년 단원과 객석을 번갈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하얀 조끼와 와이셔츠에 파란 넥타이를 메고 나온 소년들의 뺨도 흥분으로 붉어졌다.

20일 밤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지휘자 정명훈.민 부자(父子)와 한 무대에 오른 오케스트라는 부산 소년의집에 소속된 60여 명. 모두 부모 없이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다. 정씨는 2005년부터 틈틈이 부산으로 내려가 이들을 돌봐 왔다. <본지 7월 28일자 29면>
이날 소년들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으로 연주회를 시작하며 지휘자의 노고에 보답했다. 여기저기에서 기증받은 악기로 불규칙한 레슨을 받으며 연습한 그들은 설익은 '변성기'의 소리를 내면서도 마에스트로의 음악적 계획에 최대한 맞춰 갔다.

정씨는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지휘대에 섰다. 그의 손짓에 따라 단원들은 안간힘을 쓰며 배운 그대로 음악을 표현했다. 정씨는 마음에 드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들을 격려했다. 그는 1악장이 끝나자 오케스트라를 향해 소리가 나지 않는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첼로.더블베이스 연주자들과 차례로 눈을 맞췄다. 2악장의 서두를 연주할 악기들이었다.

박재선(17)군이 더블베이스를 잡고 조용히 2악장을 열어 나갔다. "음악을 전공하려면 뒷바라지가 중요하다던데 저희는 완전히 혼자잖아요"라면서도 고민 끝에 음악대학 진학을 결심한 그다. 오케스트라를 총괄해 온 김소피아 수녀는 무대 뒤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김 수녀는 학교를 빠지고 공부를 하지 않는 한 아이의 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나 "반항아라고 생각지 마세요. 이 아이는 음악만 하면 됩니다"라며 설득하기도 했다.

비극적으로 시작한 '운명' 교향곡은 4악장에 이르러 자유와 기쁨, 환희로 정점을 이루며 소년 오케스트라의 승리를 들려줬다.

소외된 아이들에 대한 '마에스트로'의 사랑은 대를 잇고 있다. 이날 공연의 후반부에선 정씨의 셋째 아들 민(24)씨가 지휘봉을 잡았다. 현재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며 작곡과 지휘로 전공을 바꾸려는 민씨의 공식적인 첫 지휘무대였다. 아버지는 피아노 연주로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을 연주하며 호흡을 맞췄다. 오케스트라의 '맏형' 같은 모습이었다. 음악을 설계해 리드하는 민씨 또한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 보였다.

정명훈씨 6남매 중 첫째 누나인 정명소 목사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21일에도 정씨 부자의 자선음악회는 계속됐다. 서울 명동 신세계 백화점에서 열린 공연에 앞서 정씨는 "이 오케스트라에는 뛰어난 실력 대신 같이 모여 한마음이 되는 힘, 즉 정신(spirit)이 있다. 지휘하면서 놀랄 정도"라고 감격해했다.

이날 오후 3시 300석 규모의 신세계 문화홀은 초만원을 이뤘다. 소년의집 연주회 소식을 전해 듣고 후원자를 자처한 서울대 음대 신수정(65) 학장은 "정말 아름다운 연주"라며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음악가 아버지와 아들이 진정한 대가"라고 말했다.

이틀간의 자선음악회에서는 총 1억7000여만원이 모금됐다. 기금은 소년의집 오케스트라 학생들의 악기 구입 및 레슨 지원, 부산 소년의집 초등학교 건립 및 부설 병원 개.보수비 등에 쓰인다.

이현상.김호정 기자
사진=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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