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문화예술교육이다 : 실버 문화 예술 아카데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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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미래의 다문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감성교육의 원천이 바로 문화예술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은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중앙일보 프리미엄과 고양문화재단은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소개하는 공동기획 시리즈를 싣는다.

호수 문화대학 문학반 어르신들 모여 만들어
공연 본 후 감상문·토론

“1970년대 후반, 광화문에 세종문화회관이 건립되고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가 내한공연을 하게 될 때 남편은 관람 티켓을 나에게 선사했다. (중략) 흰색 모헤어 투피스에 흰색 하이힐 구두에 아름다운 핸드백으로 한껏 모양을 내고 (중략) 나도 마치 영국의 백작 부인이라도 된 양 우쭐하고 마음 설렜다.”

지난 7일 오후 고양어울림누리의 한 강의실. 김운애(78) 할머니는 30년 전 일을 눈앞에 그리듯 달뜬 목소리로 감상문을 읽어내려갔다.

공연관람권을 붙여 감상문을 준비해온 임화빈(72) 할머니는 “위고의 소설 장발장은 젊은 시절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어 내용을 꿰뚫고 있어도 뮤지컬로 다시 보니 처음처럼 새롭고, 감미로운 음악에 도취돼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다”고 소개했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쏟아졌다. 발표한 할머니들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도 이어졌다.
이날 모임은 지난달 24일 ‘실버문화예술아카데미’ 회원들이 고양아람누리에서 함께 관람한 뮤지컬 ‘레미제라블’ 갈라공연 감상문을 발표하는 자리.

‘실버문화예술아카데미’는 3년제로 운영되는 일산노인종합복지관의 호수문화대학 과정을 마친 후 ‘배움’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어르신들이 모여 2004년에 만든 동아리다. 문학반 강사인 정복여(49) 시인이 힘을 보탰다. 현재 회원은 30명 남짓. 70대가 대부분이다.

초창기엔 호수문화대학 문학반의 연장 수업처럼, 정 시인의 지도 아래 시와 소설 감상 및 습작 위주로 진행됐다. 이후 정 시인의 제안으로 영화·공연·전시 등을 관람한 후 감상을 글로 표현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됐다.

“경험과 체험 만큼 훌륭한 글감이 없다”는 뜻에서이기도 했지만, “소위 ‘대중’문화라고 하는 장르에조차 어르신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정 시인이 생각해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어르신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임춘애(72) 할머니는 “혼자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영화관과 공연장을 마음껏 다닐 수 있어 여간 좋은 게 아니다”고 귀띔했다.
그동안 써온 글을 모아 얼마 전 칠순 기념으로 문집을 냈다는 노순진(70) 할아버지는 “영화 ‘밀양’을 본 후 쓴 글이 동창 모임에서 화제가 됐었다”고 자랑했다.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박봉수(71) 할머니는 “글감을 못잡아 애먹을 일이 없어 글쓰기에 용기가 난다”고 거들었다.

하지만 3년여 동안 모임이 이어지기가 쉽진 않았다. 문화예술현장을 찾아다닌다는 게 어르신들에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던 것. 70·80대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건강해 보이지만, ‘길 나서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 된 나이를 속일 순 없었다.

모임을 지속하는 데 걸림돌이 된 또 하나는 장소 문제였다. 그러다 지난 6월 고양문화재단의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지원 사업으로 선정돼 10월 말까지 고양어울림누리의 강의실을 모임 장소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실버문화예술아카데미 회원들은 앞으로도 한 달에 두 번 뮤지컬·영화·고전음악 등을 감상하고, 그를 바탕으로 글쓰기를 할 계획이다. 오는 12월말에는 문집도 발간한다.

정 시인은 “노년층이 다양해지면서 상당수의 어르신들은 이제 기존의 생활복지 대상으로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다”며 “어르신들의 적극적인 문화예술 향유를 지원해줄 수 있는 사회의 관심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리미엄 김은정 기자 hapia@joongang.co.kr
사진=프리미엄 최명헌 기자 choi31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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