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성금에 대한 배신(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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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감사원이 밝혀낸 행정기관의 성금유용실태는 공무원의 비리와 불법적 관행들이 쉽사리 개혁될 수 없는 고질적 병폐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김영삼대통령은 취임초부터 지금까지 준조세로 관례화돼왔던 각종 성금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표명했고,실제로 이를 매개로 한 정경유착의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런데 일부 중앙과 지방행정기관에서 문민정부 이후에도 여전히 성금형식으로 기부금을 「징수」해왔으며,더군다나 이 가운데 수억 내지 수십억원씩을 본래의 목적 이외의 공·사용으로 유용해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도 각종 민원업무가 있을 때마다 해당 기업들로부터 반강제적으로 기부금을 징수했다고 하니 불법·부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엄연히 기부금품 모집 금지법이 있고,그 내용에는 국가기관 또는 공무원이 기부금품을 모집할 수 없게 규정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사부는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불우이웃돕기 명분으로 모금운동을 벌이도록 했고,그것도 기간을 무시하면서까지 모금을 강행하는 탈법적 횡포를 자행했다. 더구나 이렇게 거둬들인 성금을 시장·군수 개인명의의 경조금이나 위로금 따위로 유용하거나 복지기관시설비로 전용까지 했다는 것이다. 성금을 낸 국민과 기업들의 온정과 성의에 대한 위약이요,배신이 아닐 수 없다. 날로 움츠러드는 불우이웃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온정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정부는 이번 감사결과 드러난 성금징수와 유용에 관련된 책임자를 엄중히 문책해야 한다. 김 정부의 개혁작업을 거스르는 반개혁적 요소의 척결이라는 차원에서 엄단해야 한다. 이번 감사원의 감사는 17개 행정기관으로 제한된 표본조사에 불과하다. 전국 모든 민원기관으로 감사를 확대해 성금명목의 준조세 징수 실태를 파악하고 관련자를 문책함으로써 공무원들의 유사한 비리를 근절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국민들의 의혹과 불신을 없애야만 앞으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우이웃돕기 모금이 가능할 것이다.
또 앞으로는 어떤 성격의 국민성금일지라도 모금 실적의 내용과 사용 결과를 국민에게 소상히 알리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취지의 국민성금 모금운동이 벌어져왔으나 관련기관이 그 모금과 사용결과를 제대로 국민에게 알린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비리는 비밀주의가 그 온상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모든 사회복지가 국민 개개인의 온정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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