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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감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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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둔감(鈍感), 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을 끌어내 열매 맺게 하는 원동력이다.”
올 상반기 일본의 최고 베스트셀러 『둔감력』의 ‘둔감 찬사’다. 이미 100만 부가 팔렸다. 올해 말 시상하는 ‘올해의 유행어’에서도 ‘둔감력’은 대상 후보 1순위다.

‘둔감’이라 하면 왠지 감정이나 감각이 무디다는 뜻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민감한 것보다 둔한 편이 좋다는 것이 의사 출신인 저자 와타나베 준이치의 주장이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혼나거나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때 금방 잊고 전향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잠도 잘 자고 뭐든 잘 먹고 잘 소화하는 사람이 바로 ‘둔감력’의 소유자다. 이지메(집단 괴롭힘)를 당해도, 애인의 흠을 발견해도 덤덤히 아무 일 없는 듯 넘기는 사람도 같은 부류다. 설령 지독한 냄새의 똥이라도 자식의 것이라면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고, 색이 어떤지 유심히 살피는 어머니의 마음은 둔감력의 극치다.

일희일비하거나 사사로운 일에 개의하는 것보다는 맷집 좋게 버티는 둔감력의 소유자들이 각 분야에서 성공한다는 작가의 주장에는 공감이 간다. 배워야 할 처세술이지 싶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지지율 하락에 허덕이는 아베 신조 총리에게 최근 두 차례에 걸쳐 “신경 쓸 필요 없다. 둔감력이 중요하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둔감력』을 읽고 감동한 게다. 아베 총리도 “둔감력, 그거 필요할지 모릅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대단한 ‘둔감력 콤비’다. 아베는 지난달 말 참의원 선거에서 역사적 참패를 기록하고도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나의 내각’하에서 개혁을 이뤄내겠다”는 말만 녹음기 틀어놓은 듯 반복하고 있다. 여론이 아무리 들끓어도 뭘 반성할 것인지 어떤 개혁을 할 것인지 일언반구 없다. 책임 추궁에는 언제나 동문서답이다. 게다가 이번 주에는 인도를 찾아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던 인도인 판사의 유족을 면담한다. 둔감 면에서는 스승뻘인 고이즈미는 15일 아침 문 열기가 무섭게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참배했다. 자신의 재임 중 야스쿠니 참배로 외교관계를 얼마나 뒤틀어 놓았는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작가가 주창한 건 ‘상식’과의 균형 속에서 형성되는 좋은 의미의 둔감력이다. 두 사람은 그 균형을 잊거나 외면한 게다. 그나저나 역사의 교훈에 둔감 일색인 이들에게 초연할 수 없는 나도 둔감력이 부족한 것일까.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