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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 story] "노래랑 춤 없이 살믄 대체 무슨 재미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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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리엔 늘 '신바람'이 분다

#1.

지난 12일 오후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 태극기와 새마을기가 펄럭이는 마을 회관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면세유 공급 대상 농기계 신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네댓이 모이자 김병철(40) 이장이 노관민(67) 할아버지를 부추긴다. "이래 모였응께 소리 한가락 허시죠."

"아, 하라면 하제." 금세 닻배노래가 터져나왔다. "우리 배 그물은 삼천발이요~남의 배 그물은 오백발이로다~". 고수 장단 없이도 허공에 손까지 쭉쭉 뻗으며 신명이 난다. 부락서 1㎞쯤 떨어진 뒷산 박금영(62)씨 대파밭에서도 노래 잔치가 벌어졌다. 진도 아리랑이며 육자배기가 늘어지다가 양손에 파를 쥐고 어깨춤을 추는 할머니들. 파줄기가 아리랑 팔짓에 뚝뚝 꺾이건만 아랑곳 않는 눈치다. "밭에서 요래 쪼그리구 일하믄 허리 아프잖어. 그라믄 누군가 허리 페고(펴고) '아이구 뻗치구레~'(힘들다) 그랴. 담엔 바로 '아이고메 내 팔자야'하믄서 육자배기가 나와." 이원심(75) 할머니의 설명이다.

경운기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아라린지 지랄인지~" 구성진 소리에 경운기 몰던 박상진(59)씨가 "아, 욕덜 하지 말랑께"라고 윽박지른다. 그래도 노랫소리는 높아만 간다. "죙일 일하구 피곤해두 누가 '놀자~' 하면 다 쫓아나와 한소리썩 해. 술 한잔 먹구, 소리하구 그라니까 소포에 문중이 스무 남짓 헌데 여태 웬수지고 싸우는 집안덜이 없소."

소포리의 삶은 곧 노래다.

#2.

오후 7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포리 전통민속전수관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아~. 아~.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강강술래 회원들께서는 전수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파밭 일로 파김치 된 몸을 치마저고리에 감싸고 소포리 강강술래보존회원들이 하나둘 전수관 앞마당으로 모인다. 다 모이기를 기다리는 동안 북.장구에 맞춰 노래판이 벌어졌다. "꽃 폈을 때 만난 사랑 꽃이 지자 이별이라…." 박미정(57)씨가 타령을 선창하자 "워매 좋은 거." "아이고 잘하네." 여기 저기서 추임새가 터진다. "이 좋은 장단에 나도 한번이라도 해야제." 저마다 노래를 부르겠다고 야단이다.

노래 부르는 동안 사람들이 얼추 모였다. 겨울밤 냉기에 모두들 "어이, 찰아(추워), 어이 찰아"하면서도 주섬주섬 밖으로 나온다. 모닥불을 끼고 강강술래를 돌기 시작한다. 빙빙 돌다 중간중간에 손치기놀이, 개구리잡기 등 20여가지 놀이 동작이 곁들여진다. 소포리 특유의 강강술래다.

"하이고, 띵께 안 춥구마이(뛰니 안 춥구만)." "이래 뛰면 피곤한 게 가신당께." 조정심(54)씨가 환히 웃는다.

소포리의 피로회복제인 강강술래는 사랑을 싹틔우기도 했다. 원래 소포리 강강술래도 여러 종류가 있어 가사도 다르고 춤사위도 제각각이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대 말 주재일(68.미국 거주)씨가 통합했고, 이 강강술래를 마을 사람들이 매일같이 연습해 60년 진도군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합쳐 둥글둥글 뛰어다니던 하루하루. 마침내 주재일씨와 매김소리(노래의 주요 부분을 혼자 부르는 것)를 맡은 임차복(67.여)씨가 신랑각시가 되었다는 '동네 최고의 연애담'이 탄생하게 됐다.

#3.

강강술래를 뛰고 나도 흥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몇몇이 무리지어 '소포리 어머니 노래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둥덩애 덩 둥덩애 덩'하는 '둥덩애 타령'이 문밖까지 들려온다. 흥겹고 빠른 자진모리 장단에 발걸음도 총총 빨라진다.

네평 남짓한 방은 북채를 들고 앉은 노래방의 터줏대감 한남례(70) 할머니와 동네 아낙들로 꽉 찼다. 소포리의 노래방은 쿵짝쿵짝 요란한 기계 반주와 빠른 댄스곡 대신 덩덩 북소리와 구성진 우리 가락으로 가득하다. 흥이 나면 일어나 덩실덩실 몸을 흔들다 앉은 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같이 춤을 춘다.

노래방이 할머니들 전유물이라면 농악은 할아버지들만의 흥판이다. 소포는 원래'걸군(乞軍)농악'으로 이름났다. 임진왜란 때 동냥다니는 중 행색을 하고 숨은 왜군 동정을 살피고 다닌다는 스토리를 담은 내용이다. 빌어먹으면서 군사행동을 한다고 '걸군'이라 했다.

걸군 농악은 30~40명이 있어야 제대로지만 대여섯이서도 꽹과리에 북.장구를 치며 신명을 올린다.

웬만한 솜씨로는 한바퀴 돌리기도 힘들다는 '부들상모'를 40여년째 돌리는 홍복동(69) 할아버지. "입때 감기 한번 안 걸려본 게 모다 농악 덕"이라고 한다. 처음 상모를 배울 때 어지러워 나무 기둥을 꼭 잡고 고개를 빙빙 돌려댔단다. "상모는 내가 질 오래여(제일 오래됐어). 나머지 상모잽이는 다 내 제자제."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할아버지가 말했다.

#4.

"젊어 청춘 좋은 그때/엊그젠줄 알았더니/오날 보니 늙었구나/…/아모리 격투를 하여도/가는 세월을 어찌할꼬/구경이나 하고 늙자스라…."

백발이 성성한 여든셋 박병림 할아버지지만 소리는 젊은이 저리가라다. 주름진 목까지 붉어지도록 소리를 길게 뽑는다.

농어촌이 다 그렇듯 소포리도 고령화됐다. 마을 평균 연령이 65세. 고등학교 이하의 '아덜'(아이들)은 갓난쟁이 쌍둥이까지 다 합쳐도 10명이 채 안된다. '시골 산다면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젊은이들이 다들 도회지로 나간 탓이다. 그러다 보니 소포리에선 60세 이하는 다 '청년'이다. 예순두어살 먹어서도 마을 청년회에 안끼워준다며 서운하다는 동네다.

"우리 나이가 한창 때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도시야 어떤지 몰라도 여그선 그래."

쉰이 넘어 배운 북으로 전국대회 장관상을 두번이나 탔다는 박금영(62)할아버지의 말이다.

"앞으로는 여유있고 조용한 삶을 모다들(모든 사람들이) 찾을 거라. 농촌 떠난 사람들도 다 돌아올 것이제. 우덜은 걱정 안하네."

즐겁게 일을 하면 늙지도 않는다면서 김연호(57)씨가 껄껄 웃었다. 소포리에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진도=권혁주.구희령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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