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대형 주가 조작 사건 10건 분석해 보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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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08면

주가가 하락한 날의 증권사 객장 모습. 증권사 직원의 표정이 심각하다. 올 들어 주가가 크게 오르면서 주식에 관심이 쏠리고 있으나 시장에는 작전이 난무해 일반 투자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중앙포토]

1814년 2월 영국 남부의 윈체스터.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 보이는 군복 차림의 사내가 거리를 뛰어다니며 이렇게 외치고 사라졌다. “나폴레옹이 죽었다.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했다.” 잠시 뒤 몇몇이 등장해 똑같은 소식을 전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주가가 급등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은 거짓으로 판명됐다.

성직자ㆍ주부도 가담, 지수 하락 때 '작전' 심해 #증권거래법 위반 사범 지난해 350명으로 역대 최다 … 10년 새 여섯 배 늘어

처음의 군복 입은 사람은 드 베렝거라는 주식 투자자였다. 그와 일당들이 보유한 주식을 높은 가격에 팔기 위해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었다. 이것이 ‘작전’으로 역사상 처음 단죄된 ‘베렝거 사건’이다.

2007년의 한국에도 베렝거들이 출몰하고 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06년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은 350명이다. 2005년 280명, 2004년 287명, 2003년 319명에 비해 큰 폭으로 늘었다. 1994~96년에는 각각 46명, 59명, 85명이었다.

주가 조작 사건을 전담하는 서울중앙지검 강찬우 금융조세조사 1부장검사는 “사건이
점차 대형화하고 있어 올해는 증권거래법 위반 사범이 예년보다 훨씬 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한 ‘루보 주가 조작 사건’으로만 구속·불구속 기소된 사람이 47명이나 된다.

커지고 다양해진 작전세력

취재팀은 코스닥 시장에서 발생한 대형 주가 조작 사건 10건의 특징을 분석했다. 그리고 작전에 참여한 ‘기술자’들을 인터뷰했다.

주가 조작 세력의 구성원이 다양해진 것이 첫 번째 특징이다.

루보 사건의 세력은 전국 각지에 지역책을 임명했는데 홍보 담당자까지 두고 있었다. 주가 조작 전력자(총책)의 지휘 아래 ▶금융권 대출을 받아 주가 조작 자금을 마련해 ▶주식을 사고팔 계좌를 만든 뒤 ▶매매 주문을 실행하는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올 3월까지 1500억원대의 자금을 동원하고 3000여 개의 주식계좌를 활용했다. 기소된 47명 중에는 8명의 주부를 비롯해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 사는 목사(자금 모집 총책), 간호사(울산팀장), 피부 미용실 주인(계좌 제공), 결혼 정보회사 사장(부산팀장)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의사, 회계사, 재경부 공무원 같은 엘리트군이 작전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2002년 증권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빛네트 주가 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방송에 출연하는 유명 애널리스트와 짜고 870원짜리 주식을 3850원까지 끌어올렸다.

대주주가 사채업자 등과 결탁해 주가를 조작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검찰은 “예전엔 작전세력이 자사주에 대해 시세 조종을 하는 것을 알았더라도 대주주가 이를 묵인하는 정도였으나 최근엔 전문세력과 결탁해 자사주가를 적극적으로 조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사채를 활용해 대주주가 주가를 조작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UC아이콜스 전 대표 박모(38·구속)씨. 그는 명동 사채업자에게서 160억원을 빌려 회사를 인수하고 사채업자에겐 회사 주식을 담보로 줬다. 그리고 160억원의 1년 이자에 해당하는 120% 이상 주가가 오르지 않으면 사채업자가 주식을 처분할 수 있도록 계약했다. 사채업자의 주식 처분을 막기 위해서라도 인위적으로 주가를 올려야 했다. 2400원이던 주가는 한때 2만원을 상회했고 340억원의 차익을 챙겼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개미들까지 작전에 가담하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 게시판, 대화방, 전자우편 등을 통해 주가를 조작한다. 이모씨는 자신이 사들인 주식을 인터넷 증권정보 사이트 게시판에 ‘황제주’ ‘왕대박’ 등으로 치켜세우고 ‘큰손 개입설’ 등을 거짓으로 흘리는 등 679개의 글을 띄웠다. 이어 16억8000만원에 사들인 주식을 28억5000만원에 팔았으나 검찰에 구속됐다.

하락장서 보란 듯이 올려

종합주가지수가 떨어지거나 횡보 중일 때 작전이 성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종목의 주가가 떨어지고 있을 때 작전세력이 주가를 보란 듯이 올리면서 개미들을 유인하는 것이다.

세우포리머 사건은 전ㆍ현직 증권사 직원들이 구조조정 전문회사를 만들어 2002년 2월부터 10월까지 주가 조작에 나서 800원대 주식을 1만원까지 끌어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종합주가지수는 742에서 655까지 하강곡선을 그릴 때였다.

유니텍전자 주가 조작 사건이나 세종하이테크 사건(이상 2000년 초) 등 주식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가 조작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의 종합주가지수도 100포인트 이상(870→707, 1066→908) 떨어지던 때였다. 특히 2000년은 1월 4일 종합주가지수가 1059.04로 최고점을 기록한 뒤 다음날 986.31로 마감해 하루 하락폭이 70포인트를 넘었다.

그 뒤 지수는 6일 960, 7일 948 등으로 밀려나면서 장기간 횡보를 기록하고 있었다.

세종하이테크ㆍ삼애인더스ㆍ리타워텍 주가 조작 사건 등 대부분의 대형 사건이 이처럼 주가가 하락하거나 횡보할 때 발생했다.

작전세력의 타깃은 유통 물량이 많지 않은 중소형주다. UC아이콜스ㆍ루보ㆍ흥창ㆍ삼애
인더스 등이 모두 작전 초입 당시 2000원대였다. 세우포리머 등 수백원짜리 종목도 있었다. 물량 확보가 쉽기 때문이다. 일반투자자들이 저가 주식을 선호하는 심리도 이용했다.

하루 만에 작전 끝

시장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최근엔 2~3일 만에 주가를 끌어올린 다음 차익을 챙기는 ‘번개작전’이 등장했다. 호재를 집중시켜 단기간에 주가를 끌어올린 뒤 일시에 털고 나가는 방식이다. 과거엔 작전이 한두 달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지금은 단 하루 만에 끝나는 경우도 있다. 작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아침부터 장 마감 때까지 컴퓨터 앞에 붙어앉아 주가 조작을 하곤 했다”며 “세력들은 종목을 바꿔가면서 30% 정도의 수익률을 내고 빠지기 때문에 금융당국이 적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력끼리 50여 개의 계좌에서 동시에 ‘사자’ 주문을 내면서 서로 주식을 사준 뒤 곧바로 전량 매도하면 가격이 빠지게 된다. 그리고 다시 대량으로 사들이면 거래가 활성화된 줄 알고 일반인들이 쫓아온다. 그러면 바로 털고 빠져나간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작전 참여자는 “작전을 역이용하는 것도 새로운 트렌드”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요즘은 작전이 붙었다는 루머가 돌면 오히려 개인투자자들이 몰린다”며 “실제론 작전이 없는데도 증권정보 사이트 등에 작전이 있다고 흘린 뒤 개미들이 붙으면 털고 나온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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