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대화 눈치안본다/각계인사들 「가슴속진언」거침없이 “술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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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청와대 여론수렴 호응… 관에 대한 비판도/관계자들은 예측불허 발언에 “조마조마”
김영삼대통령의 여론수렴 활동이 호응을 얻고 있다. 「국가경쟁력 강화」의 국정목표에 초점을 맞춘 김 대통령의 새해 여론조성 노력이 열매를 맺어 김 대통령을 만나는 각계 인사들의 말문이 터지고 있다. 전에는 꿈도 못꿨을 얘기들을 거침없이 김 대통령에게 건네고 개선을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더 열심히 일하고,더 뛰자」는 분위기 조성에 나선 김 대통령의 진정이 각계 인사들에게 가감없이 전달되고 있다는 징조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통령 주변에선 김 대통령의 질책을 두려워하고 그 권위에 눌려 직언을 못하는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 대통령은 정부 각 부처의 업무보고가 연일 이어지는 중에도 각계 인사들과의 면담을 병행,정부 시책을 홍보·설득하면서 정책건의도 듣고 있다.
과거 역대 대통령들이 외부인사들과의 오찬대담·다과회·의전적 면담 자리에서 형식적으로 몇사람에게 얘기를 시킨뒤 「훈시성 인사말」로 끝냈던 것과는 달리 김 대통령은 참석자 전원에게 자유로이 말할 기회를 주고 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던 참석자들이 「진짜」하고 싶은 얘기를 하게끔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빡빡한 일정을 관리하는 관계비서관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 식사까지 합해 1시간이던 면담시간이 두배로,10분내지 30분 정도의 의례적 면담 또는 다과회가 두 세배 이상 늘어나기 일쑤라는 것.
1월 중순 환경관계자들과 다과회는 당초 3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참석자들이 너도나도 발언하는 바람에 1시간30분간으로 연장됐다. 어떤 관변단체의 장은 5분정도의 의례적 면담에서 불쑥 조직활동 상황을 장황하게 40여분간이나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참석자들이 불가측한 얘기를 불쑥불쑥 던져 배석한 관계자들이 조마조마해 한다는 것.
○…지난 19일 있었던 노동계 대표들과의 오찬에서 노동계 인사들은 『정부가 노사화합을 말하면 일부 기업가들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생각한다』 『물가고속에서 임금만 자제하라는 것은 모순이다』는 등 할 말을 다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21일에 있은 30대 재벌그룹 회장들과의 대화내용에 비하면 약과다.
참석자들은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을 얘기들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구자경 럭키금성 회장은 『재무부에는 공무원이 한번 들어가면 퇴직하더라도 관련업체로 자리를 바꿔가며 70세까지 근무하는 형편이다. 그래서인지 재무부는 은행 등 산하업체를 지나치게 보호하고 있다.…여천에 4년간에 걸쳐 공장을 지었는데 규제가 무한히 많았다. 규제를 없애주면 연간 1조원 투자중에서 1천2백억원은 절감할 수 있다』며 재무·상공자원부 등 관계부처를 싸잡아 비난했다.
조중훈 한진 회장은 이를 받아 『공단은 공무원들의 직장을 만들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공단조성을 민간에 맡기고 이윤이 나면 세금으로 흡수하라』고 거들었다.
아무리 재벌들이라지만 자신들의 목줄을 잡고 있는 관에 대해 예전이라면 언감생심의 힐난이었고 전해듣는 이들이 못미더워할 그런 내용들을 스스럼없이 개진했다.
김 대통령은 이를 진지하게 경청했으며 이건희 삼성 회장이 『우리의 대외협상 능력을 높이기 위해 민관합동의 통상협상단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의하자 즉석에서 『좋은 생각』이라며 검토를 약속했다.
25일의 관광업계 대표들과의 오찬에서 참석자들은 『정부의 갖가지 규제에 묶이다보니 10달러짜리를 사다 40달러에 파는 경우가 생긴다』 『호텔 하나에 정부에서 1년간 보내온 각종 지시문서가 1천4백건이 된다』며 행정규제 때문에 「관광한국」의 구호가 허사가 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예전같으면 사업을 포기한 「막가는」 사람이나 할 얘기들을 「쉽게」하고 있는데 이는 김 대통령이 여러 비공식 채널을 통해 바닥 민의를 꿰뚫고 있으며 나라를 바꿔보고야 말겠다는 진정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김현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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