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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탐구>59.대정부질문 속사포 상공부 기피인물 박광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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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해말 예산안 날치기파동이 있기전 예결위에서는 對정부 질문을 거의 독차지하다시피한 한 의원이 눈길을 끌었다.
民主黨 초선인 朴光泰의원(光州 北甲.상공자원위)은 침묵을 지키며 쏘아보는 與黨의원들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砲를 쏘아댔다.
한 與黨의원이 세어보니 朴의원의 질의가 하루에만 90여차례가넘는 기록을 세웠다고 투덜댔다.그렇게 질의가 많아지니까 나왔던질문을 되풀이하고 정곡을 찌르기보다 주변만 맴도는 내용도 있었다. 그래도 朴의원은 예산안중에서 安企部 예비비에 초점을 맞춰『숨겨진 예산을 밝히라』며 질문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이미 民主黨 지도부에서 예산안의 처리를 최대한 늦추라는「필리버스터링」지시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94년 예산안처리는 안기부법개정과 맞물려 있어 與黨의 양보가없는한 예결위의 순조로운 의사진행을 막겠다는게 지도부의 생각이었다. 朴의원은 지난해 160회 임시국회에서 盧泰愚 前대통령의딸 素英씨 부부의 외화불법유출사건 폭로때도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朴의원은 어딘지는 밝힐수 없지만 素英씨 부부가 거액의 외화를 유출했다는 자료를 입수했다.朴의원뿐 아니고 일부 다른 의원들도 이 정책자료를 챙기긴 했으나 정작 질의는 하지 않았다는것이다. 朴의원은 이 자료를 터뜨리기로 마음먹고 질의 전날 요지를 냈다.이게 전해지자 朴의원에게는 사방에서 온갖 압력이 들어왔다.제발 그 얘기를 안할수 없느냐는 것이다.
『그중에는 靑瓦臺.安企部.與黨총무,심지어 民主黨 총무와 중진의원을 포함해 힘을 쓸수 있는 모든 곳에서 연락이 와 도저히 견딜수 없었다.』 그러나 朴의원은 이를 모두 뿌리치고 질의에서이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물론 盧前대통령측뿐 아니고 사돈 회사인 鮮京도 발칵 뒤집혔다.그 결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었다.그러나 한편으로 朴의원은 우직함이나 다혈질에서 오는 약점을 알고있다.
때문에 주위에서 그를 염려해주는 사람은 이같은 얘기를 자주한다고 한다.
『투쟁시대는 가고 문민시대가 왔으니 이제 무작정 저돌적이거나강성으로는 안된다.항상 대안을 내고 연구하는 스타일로 의정활동을 해야한다.』 朴의원의 정치스승은 많은 民主黨의원들의 경우처럼 金大中 前民主黨대표다.오랜 세월 金前대표의 비서생활을 했다. 朴의원은 69년 同鄕사람인 金善太 前무임소장관이 당시 新民黨 당무위원으로 있을 때 보좌역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활동은 金前대표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
DJ가 70년 대선후보로 지명받고 朴의원은 그의 수행겸 경호비서로 나섰다.維新이 선포되고 舊新民黨이 민주통일당으로 갈릴때거기로 가서 선전국차장.부국장.국장등의 당료생활을 지냈다.
75년에는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수배도중 靈光의 친구집에 숨어지내면서 현재의 부인을 만나 약혼하고 그후 2년간 옥살이를 했다. 10.26사태로 朴정권이 무너지고 朴의원은 다시 DJ의수행비서로 들어갔으나 5.18로 인해 정치규제에 묶였다.
2차해금으로 정계에 돌아온 朴의원은 12대때 무소속으로 光州西區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그때 막 창당된 新韓民主黨의 공천을받으려 했으나 현재 동료인 辛基夏의원에게 밀린 것이다.
朴의원은 그후 民推協에서 노동국장을 지내다 87년 平民黨 창당과 함께 선전.인권국장을 맡았다.朴의원은『현역 의원들중에 나보다 국장생활을 오래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13대에서도 朴의원은 공천을 따내는데 다시 실패했다.平民黨이민주헌정연구회 출신의 정치인을 끌어들이면서 朴鍾泰씨에게 공천을준것이다.
朴의원은 무소속 출마를 생각하다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출마를 포기했다.하도 공천을 받기 어려워 朴의원은 DJ에게「제발 공천을 좀 달라」고 무릎꿇고 큰 절을 올리기도 했으며 결국 14대에 국회입성의 꿈이 실현됐다.朴의원은 첫 의정 단상에서 많은 폭로를 해 상공자원부에는 위협적인 의원으로 꼽히게 됐다.
공업진흥청 국정감사에서 엘리베이터의 검사미비를 추궁해 감사원의 재감사를 이끌어내는가 하면 석유개발공사의 담합수주 의혹을 캐냈다는 평이다.
朴의원은『수양이 덜된 탓인지 다혈질이고 화를 잘 내는게 가장큰 결점』이라며「참고 기다리며 화를 내지마라」를 가훈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朴泳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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