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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과 영화 ‘디 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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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광복 62돌 경축식을 치렀다.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가 울려 퍼졌다. 거리에는 태극기가 나부꼈다.

전국 관객 6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디 워’의 팬들도 요즘 ‘해방’의 기쁨을 누릴 것 같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많은 평론가의 비판에 아랑곳없이 쾌속 흥행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 전문가에 대한 대중의 승리라는 섣부른 평가마저 나왔다. 실제로 네이버 ‘디 워’ 팬 카페에서는 “광복절 날 태극기를 휘날렸듯이 네이버를 ‘디 워’의 이미지로 도배합시다”라는 구호가 눈에 띄었다.

굳이 ‘디 워’의 애국심 마케팅을 재론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라를 사랑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에 돌을 던질 순 없다. 하지만 ‘디 워’를 둘러싼 작금의 논란은 분명 예전 우리 대중문화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디빠’ ‘심빠’로 상징되는 극성 팬들이 집단파워를 앞세워 소수의 전문가를 궁지로 몰아넣고, 사이버 테러까지 서슴지 않았다.

다행인 건 최근 소모적 논쟁이 수그러들었다는 점이다. 네이버 팬 카페에도 자숙의 목소리가 높다. 카페 매니저(아이이 코디)조차 “일부 극성 팬이 ‘디 워’의 모든 팬을 대변하는 건 아니다”라며 “다양한 의견을 교류하는 동호회다운 동호회로 돌아가자”고 요청했다. 일방적 비방이 아닌 건설적 제안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꾸려가자는 것이다.

‘디 워’ 팬 카페는 소위 연구 대상이다. 매니저·부매니저 등 40여 명의 스태프가 자발적으로 끌어간다. 그것도 한 영화를 위해 자원봉사를 한다. 그만큼 영화에 빠졌다는 뜻도 되지만 누가 시킨다고 될 성질의 일이 아니다. 팬들은 스스로 홍보 영상도 만들고, 영화 관람과 OST 구매를 유도한다. 최근에는 오프라인 만남도 주선 중이다. 지역별·시도별 지역장(모임장)을 모집하고 있다. 오프라인 모임을 이끄는 유령부샾과 통화를 했다. 34세의 직장인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스태프 전원이 회사원·대학생이라고 말했다. 이미 ‘디 워’를 여섯 번 관람했다는 그는 “그냥 영화가 좋아 모였다. 영화사 측의 지원은 없다. 간단한 회비로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또 “우리는 진중권(MBC ‘100분 토론’에서 ‘디 워’의 허술한 서사를 꼬집었던 문화평론가)을 타도하자는 모임이 아니다. 더 나은 영화를 위한 비판을 수용한다”고 강조했다.

‘디 워’ 팬 클럽은 ‘시티즌 마케터’의 전형이다. 최근 동명의 책으로 번역·출간된 시티즌 마케터는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벤 매코넬과 제키 후바가 만든 용어. 본인도 모르게 자신이 좋아하는 제품과 회사를 위해 기꺼이 뛰는 사람들을 뜻한다. 초고속 인터넷 환경과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웹 2.0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소비자다.

저자들은 신문·방송 등의 매스미디어, 평론가·교수 등의 지식인 집단이 아닌 풍부한 정보와 경험으로 무장한 개별 네티즌의 파워를 주목하고, 또 그들이 바꿔놓은 대중문화·기업경영의 현주소를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네티즌’이 아닌 ‘시티즌’이다. 권위와 통제를 거부하되 열정과 책임을 겸비하고, 나를 넘어선 공공의 선을 지향하고, 민주화된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사람들이다. 초고속 네트워크 시대에도 민주시민의 조건은 달라질 게 없고, 되레 그 가능성을 구현할 여지가 확대됐다는 시각이다. ‘디 워’ 팬 카페가 그런 성숙한 모습을 촉구하고 나서 반갑다.

마지막 부탁 한마디. ‘디 워’ 광팬들이여. 일부 평론가·기자들의 글에 달아놓은 악성 댓글을 즉각 삭제하시길! 그래야 ‘어린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시길! 욕설과 비방으론 한국 영화는 물론 광복절을 맞은 우리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기억하시길!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