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논단」에 실린 박태준씨 항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내가 나섰으면 김대중씨 됐을 것”/노 대통령 말뜻 잘못 파악해 실패/막판에 안기부장시켜 포기 종용
작년 5월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외압시비를 야기한뒤 정계를 은퇴,지난 3월10일 일본으로 건너가 칩거중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이 오랜 침묵을 깨고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원망과 함께 포항제철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에 대해 「무죄」라고 항변했다.
박씨는 지난달 29일 일본 동경의 한 음식점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월간 『한국논단』의 발행인 이도연씨와 만나 그간의 심경을 밝혔으며,대담 내용이 『한국논단』 1월호에 실렸다.
○신원문제 들먹여
박씨는 『노 대통령의 모호한 태도로 대권출마를 시도했다가 뒤늦게 출마포기를 강요한 노 대통령의 요구로 중도포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영삼대통령과의 화해 가능성에 대해 『한국에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말로 그럴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대담내용을 몇가지 주요항목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정계은퇴 배경=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92년 1월 노 대통령이 경선을 공언했으며,넌지시 출마를 권유해왔다. 그런데 막상 출마의사를 밝히자 그는 특유의 아리송한 말로 얘기를 돌리기만 했다.
확실한 뜻을 알아보고자 그와 친한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과 조남풍 당시 기무사령관을 통해 의중을 타진했더니 한결같이 『출마를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서보라고 한다』는 답을 얻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하던중 이종찬·이한동의원도 노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본인들의 입을 통해 알았다. 노 대통령은 우리 세사람을 부추긴 것이다.
그때 『박태준은 안된다』는 제한경선론이 YS측에 섰던 김윤환의원으로부터 나오길래 『경선한다고 하고서는 이제와 무슨 소리냐』고 항의했는데 이상연 당시 안기부장이 만나자고 했다. 두차례에 걸쳐 출마포기를 강요당했다. 이를 거부하자 노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해 『안기부장 뜻이 바로 내 뜻이다. 협조해달라』고 하면서 『출마하면 신원문제도 생길 수 있다』는 협박 비슷한 얘기도 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탈당하고 싶었지만 동료들이 워낙 말려 못했다. 내 마음대로 했다면 김영삼씨가 당선되지 않고 김대중씨가 당선되거나 정주영씨가 생각을 바꿔 강영훈씨 같은 후보를 내세워 당선됐을 것이다.
그때부터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해야하니 고통스러웠다. 노 대통령이 탈당하면서 한마디 사전 얘기도 안해주는 수모도 겪었다. 정계은퇴를 결심했지만 『선거가 끝날 때까지 있어달라』는 김영삼씨의 간청에 『선거가 끝난뒤 정계를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일서 치질수술
광양에서 마지막으로 김영삼씨와 담판할 때도 『나좀 살려달라. 인간적인 입장을 이해하달라』고 하니까 그도 『앞으로 서로 욕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염려말라. 앞장서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당선을 빌겠다』고 했다.
▲장기외유경위=정계은퇴 결심후 경제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회사(포철) 일을 위해 중국·미얀마 등을 다니다가 치질이 심해져 일본에서 수술을 받았다.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3월초 주주총회가 있어 일시 귀국했다. 그런데 회사쪽 사람들이 이미 2월 중순부터 세무조사가 시작되는 등 심상치 않다며 외유를 권유해 일본으로 왔다. 이후 몸속에 물방울이 발견돼 지난 6월까지 진료를 받았다.
▲포철 조사결과=정치자금과 연관해 아무리 조사해봐야 회사돈을 정치자금으로 유용한 흔적은 한군데도 없으니까 시집간 딸의 주식까지 전부 내 재산이라고 발표했더라.
사실 회사돈을 정치자금으로 쓰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정치를 하나끼 이런 저런 명목의 성금이 많이 들어왔지만 즉시 아래로 나눠주었지 내 앞으로 쓴 일은 없다. 내가 데리고 일했던 친구들이 개혁그룹과 짝자꿍이 돼 창설자인 나의 이력을 난도질하는 것이 가장 큰 인간적 수모요,충격이었다. 이를 극복하는데 4개월이 걸렸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나.
○한국엔 친구없다
▲김 대통령과의 화해 및 귀국의사=일본에는 친구가 몇명 남아있지만 한국에는 친구가 한명도 남아있지 않다. 내 앞에서 하던 말들은 기회주의적이었던 말이 많았다. 내가 이 지경인데 얼굴 내비치는 커녕 편지나 전화 한통도 없다. 나는 김옥균과 같은 입장이 된듯하다. 실패란 소리는 하지말라.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인생을 뜻있게 바쳤다. 국민과 국가로부터 인정도 못받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귀국이 있을 수 있나.
▲근황=어려운 점이 많지만 나카소네,미야자와,다케시타 전 일본 총리 등 정치인들과 세지마(이등충 상사고문)씨 등 고마운 일본인들이 도와주고 있다.<오병상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