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간수(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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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8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멕시코의 국립인류역사박물관에 일단의 도둑이 들었다. 이들은 사기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문화재 1백44점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훔쳐갔다. 도난당한 문화재들은 주로 보석들인 아즈텍문명과 마야문명의 정수들이어서 멕시코 국민들은 물론 전세계의 여론이 들끓었다. 이날 밤 9명의 경비원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잠을 잤다고 시인했고 전자경보장치는 이미 3년전부터 고장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한번 국민들을 흥분시켰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문화재 도난이 가장 심한 나라는 이탈리아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년동안 도난당한 문화·예술품이 무려 30만점으로 해마다 박물관 1개소씩이 없어지고 있다고 얘기될 정도다. 도난건수는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으나 회수율은 3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최근엔 문화재 도난사건의 주무대가 동유럽으로 옮겨지고 있다. 체코나 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 등 동유럽의 박물관과 성당·교회·사원 등에 소장돼 있는 값비싼 미술품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없어지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라진 문화재들이 며칠 뒤면 베를린 등 서유럽 예술품 암거래시장에 나타나 거래되고 있다. 이들 동유럽국가들의 예술품이 쉽게 도난당하는 이유는 이들의 관리상태가 매우 허술하기 때문이다. 훔친 미술품들이 개방된 국경을 통해 쉽게 반출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 도난사건이 빈발하기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88년이래 5년동안만 해도 1백10여점의 문화재가 도난당한 것으로 집계돼 있다. 그 가운데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사의 범종은 매일 밤 자진보살이 훔친 범인의 꿈속에 나타나 꾸지람하는 바람에 자진반환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문화재들의 도난사건이 빈번히 일어나는 이유는 그 간수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26일 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전시중이던 월인석보 등 고서문화재 3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자세한 도난경위야 조사해봐야 밝혀지겠지만 분명한 것은 전시실의 관리소홀이다.
전국 4백20여군데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들의 방범·방재 설비도 온전할리 없다. 이대로면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할 자격마저 없어질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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