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날치기 소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장소 바꾸거나 야 출석전 통과는 옛날수법/90년부터 사우나 유인·무선마이크까지 이용
「날치기」라는 범죄용어가 우리 헌정사를 특징짓는 대표어가 될 정도로 역대 국회는 날치기를 상습·반복해왔다. 그러나 「도둑질도 자주하면 는다」는 말처럼 날치기는 해를 거듭하면 횟수가 늘어났을뿐 아니라 수법도 첨단·선진화돼왔다.
오래전의 날치기는 그래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이뤄져왔다고 할 수 있다. 날치기를 하면서도 가능한한 원래의 회의장을 지키면서 정식 회의진행 과정을 거치고자 했다.
1공화국 시절인 58년 보안법 파동 당시에는 법사위에서 보안법을 날치기하면서 시간관념이 희박한 인간적 허점을 이용,야당 의원들이 미처 출석하기전인 예정시간 정각에 여당 의원들이 일제히 정시 출석해 3분만에 원안통과됐다.
장소를 속이기 시작한 것은 3공화국인 69년 3선개헌 파동 때부터. 당시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점령으로 날치기를 막았다고 안심하고 있던 순간,여당 의원들은 새벽 2시 가로등마저 꺼진 무교동을 지나 국회 별관으로 살짝 숨어들어 날치기 처리했다.
날치기의 수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90년대부터. 이 때부터는 야당 의원들을 따돌리는 수법도 교묘해졌으며,날치기처리 과정에서 굳이 관례화된 의사봉을 고집하지 않았고 속기록도 녹음기로 대체했다.
90년 7월 당시 김재광 국회 부의장은 야당 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한채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의 의사당 진입을 막아냈다고 기뻐하던 순간,의석 뒤쪽에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서면서 단하에서 무선마이크를 이용해 단 30초만에 방송관계법 등 26개 안건을 처리해버렸다. 속기록도 김 부의장옆에 있던 녹음기를 통해 녹취한 내용을 옮겨 적는 방법을 사용했다.
91년은 날치기의 극성기. 정기국회중이던 11월25일부터 27일까지 여당은 무더기 날치기를 강행하면서 갖가지 선진수법을 총동원했다. 문공위는 총무회담이 진행중이던 순간의 방심을 이용해 날치기했고,건설위는 여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에게 『사우나하러 가자』고 유인한뒤 되돌아와 전격 처리하기도 했다. 내무위에서는 위원장이 몸싸움으로 땅바닥에 누운채 날치기했으며,농림수산위는 『내일 회의하자』며 여당 의원들이 전부 퇴장했다가 몰래 다른 회의장으로 옮겨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래 국회는 결국 박준규의장이 여당 의원과 사무처 직원들의 스크럼속에서 본회의장 통로에 선채 무선마이크로 15초만에 날치기하는 신기록으로 마감됐다.<오병상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