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보다 당리” 꼴불견 여야/이상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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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회는 29일 온종일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주한 외교사절 등이 방청하는 가운데 김영삼대통령의 미국방문 결과를 듣기 위해 열린 본회의는 민주당의 반쪽 지각참석으로 꼴불견을 연출했다.
이어 열린 민자·민주당 3역회담에서 양쪽은 얼굴을 맞대자마자 본회의 일로 고성을 교환하더니 결국 현안논의에 있어서도 서로 당리당략을 버리지 못해 아무 성과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양당은 역시 예결위에서도 본안인 예산안 부별 심사는 뒤로 제치고 대신 지칠줄 모르는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상대편을 비난하기게 바빴다.
여야가 이처럼 정쟁에만 몰두하는 가운데 예산안 법정시한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는 이제 성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민주당이 대통령 연설에 불참한 것은 순전히 우리 쌀과 농민만을 생각한 까닭일까 의아심이 생긴다. 쌀시장 개방문제가 대두됐을 때 걱정에 앞서 『이제야말로 정부·여당을 밀어붙일 수 있게 됐다』고 계산하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안기부법 개정에다 쌀문제까지 얹어 예산안 처리와 연계시키면서 『날치기가 이뤄지면 더 이득』이라는 속셈은 없었는가 반문하고 싶기도 하다. 대통령이 국회연설에서 쌀시장 개방에 대한 정부의 최종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은 아쉽고도 유감스런 대목이다. 그러나 이를 핑계로 자신들이 합의한 의사일정을 헌신짝처럼 팽개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정치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국정운영과 관련해 책임이 훨씬 큰 민자당도 역시 문제다.
민자당은 우리의 최대 현안이자 관심사인 쌀문제에 대해서는 가능한한 개입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김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논의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 자꾸 트집이냐. 그 문제는 넘어가자』고 할뿐이다.
야당과의 협상에도 석연찮은 점이 있다. 여당 3역들은 늘 『잘 안될 것 같다』는 등 마치 자포자기한 인상을 주면서 협상은 끝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야당이 기어코 합의해주지 않을 경우 법을 지키는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여당의 이런 말은 솔직히 예산안 날치기라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속셈으로 감지된다. 『우리는 할만큼 했는데 야당의 황소고집 때문에 일이 모양새 나쁘게 됐다』는 인상을 만들기에 급급하다.
쌀문제가 여야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전체의 문제라는 점에서 여야가 지혜를 짜내 국익에 합당한 결론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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