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안 심사 왜 질질 끄나/이상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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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새해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12월2일)이 불과 10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국회 예결위는 계속 황소걸음이다. 20일간의 활동기간중 1주일을 92년도 예산의 결산과 예비비 지출 승인건을 다루는데 소모했던 예결위는 내년도 예산안 심사에 들어갔으나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우선 민주당측이 지연전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산안 처리와 안기부법 개정 등 개혁입법 작업을 연계해 많은 전리품을 얻어내겠다는 작전에서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 의원들은 결산심사때 본 안과는 무관한 추곡수매·안기부법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따져 시간을 끌었다.
또 새해 예산안 심의 이틀째인 지난주 토요일에는 주말 약속 등을 핑계로 아예 정책질의를 거부했다. 22일에는 이동복 안기부장특보의 훈령조작 의혹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예결위에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해 심의시간을 소진했다.
예결위 활동의 부진은 또 의원들의 자질·공부부족에서 연유한다는 지적이 있다. 결산때 이미 헛소리와 욕설 등으로 실력을 과시했던 예결위원들은 새해 예산안 심의때도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엄청 낭비하고 있다. 22일의 경우 정부의 냉해피해액 산출근거를 추궁하다가 오전시간을 허비했다.
어떤 민자당 의원은 벼 평년작 산출과 관련한 자기만의 순진한 계산법을 내세워 농림수산부가 냉해피해를 축소조작했다고 호통쳤다. 한 민주당 의원은 『돼지는 파동이 날 때 피해보상을 안해주면서 왜 벼 냉해피해는 보상해주느냐』고 용감하게 따졌다. 또 한 민자당 의원은 오후 질의에서 자기지역의 사회복지시설인 꽃동네를 들먹이면서 간호인력 확충이 시급한 만큼 방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해 빈축을 샀다.
이렇듯 예결위가 시간만 축내면서 심도있는 심의를 못하자 벌써부터 예산안 졸속처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43조2천억원에 이르는 방대한 예산규모의 대강과 세목에 대한 타당성여부,신규사업의 우선순위 등 찬찬히 따져보고 이리저리 짚어보아야 할 대목이 많다. 정말 시간과 힘을 쏟아부어야 할 실질심사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여야는 상임위에서 얼마든지 따질 수 있는 문제,이미 상임위 등에서 재탕 삼탕한 문제점 등을 예결위에서 진부하게 우려먹는데 전심전력하는 형편이다. 서기 2000년대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우리 국회는 여전히 「단기 쌍8년도」 의식에서 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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