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실시3개월>5.사채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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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치」(수십억원을 굴리는 중간규모의 사채업자)들이 조금씩활동을 재개하고 있지만 물건(어음)이 없어 개점 휴업 상태입니다.금리를 좀 더 먹자고 당장 넘어갈 것 같은 기업한테 돈을 줄 수 있습니까.』 서울명동의 사채중개업자 崔모씨(43)는 實名制 자체의 충격은 어느정도 가라 앉았으나 돈줄 곳이 없는 요즘의 시중 자금흐름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실명제로 된서리를 맞았던 私債시장은 실시 초기의 잠복상태에서벗어나 여러가지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상황이 예전같지 않다는이야기다.
한때는 이름을 밝히기 꺼리는 사람들이 보유한 양도성 예금증서(CD)를 덤핑 매입하거나 수수료를 받고 實名전환용 이름을 빌려주는가 하면 장.단기 어음을 맞바꾸는「어음박치기」,액면이 큰어음으로 바꿔주고 차액을 챙기는「사채 꺾기」등 신종 수법도 동원했다.그러나 그것도 한때의「반짝 일」이었을 뿐이다.
「본업」인 어음할인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대기업이나 알찬 중견기업들은 그동안 통화가 많이 풀리자 사채시장에 발길을 거의 끊었고 실명제 여파에 허덕이는 중소기업과 건설업체.영세기업만이손을 벌리고 있다.사채 업자들은 그러나 기업 부도 위험이 커지면서 B,C급 어음을 꺼리는 보수적인 자금운용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량기업 어음인 A급 어음할인금리는 최근 월 1.
2~1.3%로 실명제 이전 수준을 되찾았으나 B,C급 어음할인금리는 월 1.7%에서 심하면 2.5%에 이르는등 여전히 높다.시장이 위축된만큼 사채업자들의 변신 몸부림도 다 양하다.
서울신사동에서 대졸 직원 3명을 두고 수백억원대의 기업형 사채를 굴려온 A상사는 요즘 문을 닫아 걸고 직원들이 해외출장을나갔다.때마침 검찰이 대대적인 反실명제 事犯수사에 나섰기 때문에 일단「소나기」를 피해가자는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는 아예 부동산등 해외투자의 길을 살펴보기 위해서다.이 업소는 무역어음할인으로 주업을 바꿀 것도 검토하고 있다.일부「큰손」들은 사채시장을 빠져나가 증권이나 채권시장 쪽으로 자금을 옮기고 있다.
『최근 사채업자로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1백억원 정도 투자자금이 있으니 신분노출을 막아주면 채권투자를 해보고 싶다는 문의가종종 들어온다』고 D증권 관계자는 밝혔다.
10억원이하의「잔챙이」錢主들은 신용카드대출로 대거 전환해 카드대출이 실명제 이전보다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다.시장통이나 상가지역을 중심으로 일수놀이가 더욱 성행하게 된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무자료 거래를 많이 하던 상인들이 실명제 이후 자금난을 겪는데다 금융기관거래를 기피하는 현상을 포착,수천만원짜리 일수업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大邱중앙상가에서 옷가게를 하는 車모씨(41)는『실명제 이후 현금거래만 이뤄지다보니 급전이 필요해 일수 쓸 일이 많아졌고 세금추적이 두려워 수입금도 은행에 넣기보다는 일수로 돌리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결국 실명제뿐 아니라 금리자유화까지 겹쳐 거액 錢主들은 운신이 날로 어려워질 것이며 소액 錢主들만이 제도권 금융의「틈새」를 찾아 살아남는 형세가 될 것』이라고 명동의 한 사채업자는진단했다.
이 업자도 곧 사채업을 그만두고「맘 편하게」강남에 빌딩을 하나 사 임대업이나 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李在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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