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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볼 ⑭ 아산 마을 축구대회 "56년 됐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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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그리 내세울 만한 특산품도, 사람들을 끌어당길 만한 관광지도 없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그런데 이 마을의 자랑거리가 있다. 1952년 시작돼 56년간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져 온 축구대회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잠시 멈추고, 휴전을 향해 치닫던 52년 여름. 피란 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둥지를 찾아 돌아왔다.

잿더미 속에서 희망을 찾던 둔포면의 청년들이 "면민들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축구대회를 열자"고 뜻을 모았고, 당시 실세였던 의용소방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부락 대항 축구대회가 시작됐다. 날짜는 조국 광복을 기념해 8월 15일로 정했다.

우여곡절이 어찌 없었을까. 57년 대회에서 판정을 둘러싼 시비가 부락 간의 싸움으로 번졌고, 재경 둔포향우회가 나서 명맥이 끊어질 뻔한 대회를 살렸다. 지금은 둔포면 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하는 '면민의 날' 행사로 자리 잡았다.

"축구대회 하는 날은 동네 잔칫날이었어요. 가게는 전부 철시했고, 부락마다 리어카에 솥단지를 싣고 와서 고깃국을 끓이고 막걸리를 돌렸지요. 저마다 꽹과리를 치고 응원을 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의자 위에 올라가서 경기를 봤다니까요."

면민의 날 추진위원장 홍창남(63)씨의 말이다.

부락 간에 경쟁도 치열했다.

"공 좀 차는 애들은 외지에 있다가도 죄다 내려왔어요. 군대 간 애들 불러오느라고 가짜로 '어머님 돌아가셨다'고 부고를 보내기도 했지요."

40년 단골 선수 석차근(61)씨의 회고다.

올해도 15개 팀이 출전한다. 예전에는 부락별로 한두 팀씩 나왔지만 지금은 청년들이 도회지로 빠져나가면서 선수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요즘은 둔포 초.중학교 동창회 팀과 둔포면에 소재한 기업체 팀이 출전한다. 둔포성당도 출사표를 냈다.

대회를 사흘 앞둔 12일, 비가 내리는 둔포초등학교에서 출전 팀들이 마지막 훈련을 하고 있었다. 올해 처음 출전한다는 둔포중 46회 팀의 윤영수(24)씨는 "축구대회 덕분에 선후배 간 화합이 남다른 것 같다. 대부분 동창회를 8월 15일에 맞춰 한다"고 말했다.

스타도 배출됐다. 둔포초 출신 이학종은 고려대와 울산 현대에서 이름을 날렸고, 국가대표까지 했다. 그가 수원공고에서 키운 선수가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고, 이현승(전북 현대, 프로축구 최연소 골 기록)이다.

어찌 둔포면뿐이겠는가. 전국 방방곡곡에 1년에 한두 차례 축구대회를 하지 않는 동네가 있을까. 자그마한 축구공의 움직임 하나로 할아버지와 꼬맹이가 함께 함성을 지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손뼉을 마주친다. 서먹서먹하던 아파트 703호와 705호가 이웃 사촌이 된다. 이것이 축구의 힘이다. 웰컴 투 풋볼.

정영재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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