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23.70년초 통일벼 개발 농진청 육종개발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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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기적의 쌀」통일벼.지금은 米質이 나빠 재배조차 하지 않지만통일벼는 한때 우리의 주린 배를 채워줬던 녹색혁명의 대명사였다.불과 20여년 전인 7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75%에 불과했다.
밥상 위의 꽁보리밥을 하얀 쌀밥으로 뒤바꿔놓은 사람들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농업진흥청 시험국 작물시험장 육종개발팀.이들의노력으로 75년부터 식량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쌀이 남아돌게 일대 녹색혁명을 실현시킨 것이다.
당시 팀장이던 崔鉉玉박사(75)는 지금 수원시고등동에서 여생을 즐기고 있고,육종과장이던 裵聖湖박사와 연구관 朴來敬박사(62)는 작물시험장 명예직으로,필리핀 유학중 개발을 도왔던 許文會박사는 서울대 명예교수,연구관 鄭根植박사는 경남 밀양의 영남작물시험장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통일벼는 65년 시작된 식량증산계획에 따라 68년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기술제휴로 본격연구를 시작,7년만인 71년10월 일반농가에서 첫수확을 올렸다.이들은 당시 식량자급자족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던 통치권의 조급한 발표로 통일벼가 좀더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점을 몹시 아쉬워하고 있다. 『생산량에 비해 맛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던 통일벼는 그러나 몇가지 중요한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재래종은 키가 1m나자라지만 잎이 축 늘어져 정작 광합성작용에 약했어요.도열병등 병충해에도 약했지요.반면 통일벼는 키가 60~70㎝로 작고 잎이 직립형이었지요.생산량이 많고 병충해에도 강했어요.』 병충해에 강한 필리핀산 열대지역 품종에다 대만산 재래품종과 일본 북해도 지역품종을 적절히 교배,새롭게 탄생된 품종이 통일벼라고 설명하는 朴來敬박사는 통일벼가 우리나라 토질에 정착되기 전인 70년대 초에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빨리 발표된 것은 3선개헌.10월유신등 당시의 국내정세와 관련이 없지않다고 밝혔다.
『현재 농민들에게 환영받는 一品벼.西安벼.東津벼.珍味벼 등은사실상 통일벼의 직립초형을 더욱 개량 발전시킨 것입니다.최근에는 쌀알이 굵고 큰 大粒種,밀식재배용 多粒種,술주조용 酒造米,밥의 향기가 뛰어난 香米,각종 색깔을 띠는 有色 米등 특수미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벼육종기술이 일본을 제치고 사실상 세계 최고수준에 올라있다고 자랑한다.농진청 육종팀이 종자은행에 보유하고 있는 볍씨만 2만5백여종이나 돼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라고.또 최근 농촌일손이 모자라는 점을 고려,모내기가 생략되는 직파법 등이 곧 실용화단계에 이르렀고 개방화시대에 대비해 세계적 명품으로 꼽히는 미국의「칼로스」,일본의「고시히카리」이상으로 모양과 색깔.맛.촉감.탄력성.찰기 등에서 뛰어난 품종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고덧붙였다.
[水原=裵有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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