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중기 실명제 고통여전-담보능력 부족 정책자금 그림의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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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제 버틸만큼 버텼습니다.』 서울 麻浦에서 7명의 직원과 함께 기계제조업을 하는 H社의 金眞雄사장(35)은 요즘 실명제실시 두달여를 자신이 어떻게 견뎌냈는지 기억조차 못하겠다고 말한다. 金사장에게 최대고비는 실명제 실시 10여일만인 8월24일이었다.
갑자기 돌아온 어음 1천5백만원을 막기위해 새벽부터 오후4시까지 점심도 거르며 정신없이 뛴 하루였다는것.결국 그는 고교동창회의 기금을 끌어다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정부가 영세기업들을 지원하기위해 정한 긴급경영안정자금을 이용해봤느냐」는 질문에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8월말께 그동안 거래해오던 은행 지점을 찾아갔습니다.급한 어음을 막기위해 1천만원의 긴급경영안정자금이 필요해서였죠.사정얘기를 다 털어놓기도전에 은행대리로부터 자금신청이 이미 다 차서 안된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金사장은 이날 다른 은행원으로부터 영세기업은 도산 위험이 높기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업체에 몰아주기로 은행에서 내부방침을 정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9월초순 다시 은행을 찾았으나『아무리 정책자금이지만부도나면 그 책임을 누가 지겠느냐』는 반응에 담당은행원과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金사장은 정부가 우리같은 영세기업을 최우선으로 지원한다고 누차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보았으나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
서울 文來洞에서 1백2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연간매출 3백억원에 담보도 든든한 H중소전자업체 韓모사장(47)의 사정은 다르다. 『실명제가 실시된지 얼마되지 않아 거래은행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중소기업지원자금이 나왔는데 쓰지않겠느냐는 내용이었죠.이튿날 바로 2억원을 대출해주더군요.』 실명제 실시로 중소기업 모두가 판매부진과 자금난으로 고생하지만 이를 체감하는 정도는 小기업쪽이 훨씬 크다.실명전환마감(12일)이후 어려움은 더해지고 있다.
은행대출을 놓고「貧益貧富益富」현상이 벌어져 담보가 확실한 중견기업들은 정부지원자금과 협력 대기업의 지원으로 자금난이 예상보다 심하지 않은데 반해 小기업들은 친구.친척들의 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국이 발표하는 부도율에 당좌거래가 없는 영세기업의 도산이 잡히지 않는다는점을 고려하면「중소기업의 위기가 끝났다」는 정부일각의 판단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 대부분 중소기업인들의 지적이다. 무자료거래가 힘들어져 된서리를 맞은 도매시장의 어려움이 본격적으로 제조업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것도 심상찮다.
江原道束草市의 중소식품업체인 S식품 朴사장은 요즘 서울오장동도매시장을 찾을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최근들어 거래 도매상으로부터 앞으로는 무자료거래가 힘들어져 세금이 그만큼 많아졌다며 이른바 세금납부용「꺾기」로 판매대금의10%를 꼬박꼬박 떼고 있기때문이다.
이와관련,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金政洙조사부장은『이제부터의 중소기업정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사채시장 이용률이 높았던 중소기업들을 은행등 제도금융권으로 끌어들일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금융관행이 바뀌지않는한사채시장을 찾는 중소기업은 다시 생길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실명제가 오히려 영세기업의 사채금리만 높인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니까요.』 담보력이 부족한 영세기업들의 實相을 들여다보고 현실에 맞는 정책을 개발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朴承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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