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시대>28.내가 읽은 사람의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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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내가『사람의 아들』을 읽은 것은 스물 두 살 때였다.79년9월 입대한지 1년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이른바 YH사건이 얼마전에 있었고 10.26이 일어나기 한달 전쯤이었다.「이룩하자 유신과업」이라는 팻말이 꼿꼿하게 세워진 대공초소 에서 나는 이소설을 야금야금 읽었다.
아직은 소설이란 걸 쓰기 전이었다.병영 주변의 산과 들을 보며 끄적거린 조각글들을 상황실 등사판으로 밀어 몇몇 전우들과 나눠보는 게 고작이었다.낙엽지는 것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리던 시절,이 소설은 내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 가왔다.너덧개의 종교집단을 전전하다 휴학계도 내지 않은 채 입대해버린 나로서는 아하스 페르츠가 나오자마자 넋을 잃은 듯 빠져들 수밖에없었던 것이다.
성경이라는 거대한 서사가 어느 민족,어느 신화에서 영향받았는가를 유난히 따지고 드는 종교집단이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있고,한때 그들로부터 맹렬한 학습까지 받았던 터라 이 소설에 대한나의 관심은 유별난 것이었다.
이집트와 페니키아 해변,바빌론과 페르시아 고도,그리고 인도와로마에 이르는 아하스 페르츠의 노정은 그동안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던 젊은 예수의 노정이며,새로운 진리와 신을 찾으려는 이문열과 독자인 내가 함께 떠나는 지극히 골몰스런 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빠져든 이유는 무엇보다 소설적인 재미 때문이었다.매력적인 얼개와 지사다운 문장,그리고 눈부신 박학함에 근거한 도저한 상상력이 매일처럼 나를 침몰시켰다.너무 빨리 읽혀지는 게 아까워 하루에 스무장 이상 읽지 않으려고 무 진 애를썼고,그러다보니 나는 날마다 황홀한 침몰을 그리워하는 이상한 매저키스트가 돼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것은 10.26이 나고 나 자신이 계엄군이 되며 맞은 80년대 이후로,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소설 형이상학을 거짓말처럼 잊고 살았다는 것이다.왜였을까.아마 그뒤적어도 10여년 동안은 이 소설 속에서 죽은 조 동팔이의 격렬한 원혼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지 않았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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