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정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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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는 국민의 언어생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방대한 법률·행정용어,각종 정책의 강조사항·구호 등이 그대로 국민의 일상생활의 말 가운데 녹아들어 통상언어의 중요부분이 된다. 노태우대통령시절 유행한 「보통사람」이란 말이나 김영삼정부 출범후 「개혁」이니 「윗물맑기」란 말이 쓰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부가 어떤 형태의 술집을 「단란주점」이라고 부르면 그것이 곧 그 이름이 되고 어떤 택시를 「모범택시」라고 하면 그대로 불린다.
언어에 있어서도 정부의 힘은 이처럼 크다. 그런만큼 국민의 언어생활에 대한 정부의 책임도 이처럼 큰데 역대 우리정부가 그 점을 얼마나 알았고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가령 「단란」이라면 원만하고 친밀하게 지난대는 뜻의 말인데 「단란」 술집에서 살인이 일어날 수도 있고 주먹다짐의 불화도 없을 수가 없는데 이름이 「단란」이라니 그게 맞는 용어선택이었얼까.
또 많은 모범택시 중에는 얌체짓을 하는 「비모범」도 있게 마련인데 아무리 얌체짓을 해도 어디까지나 「모범택시」인가.
『약국은 재래식 한약장외의 별도 약장을 두고 께끗이 관리하여야 한다』­이것이 한­약분쟁의 불씨가 된 저 우명한 약사법 시행규칙 11조였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약국에 한약장을 둘 수 있다는 건가,아닌가.
이처럼 정부부터 국민언어를 혼란스럽게 하고 적절치 못한 용어를 쓴 사례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부가 이런 말을 쓰면서 2세한테 어떻게 우리말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 있을까.
최근 우리사회의 언어오염은 심각하다. 대통령의 사투리를 애교로 흉내내다 「우째 이런 일이…」 「학실히」라는 말 등은 이미 유행어가 돼버렸고,일부 젊은세대 사이에는 「넉넉하다」를 「널널하다」고 쓰는 등 우리말인데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속어들이 판을 치고 있다.
말이 살이있는 한 그 민족이 죽지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기에 일제강점때 많은 선열들이 우리말을 지키자고 감옥도 가고 죽음을 사양하지 않기까지 했다.
9일은 한글날 5백47돌이었다. 정부가 지금 할일이 많지만 점점 밀려나고 잊혀져 가는 많은 고유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는데도 관심 갖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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