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여자의4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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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3.가을 다음 해 구월(15) 넓은 커피숍,은서는 여기에 들를 때마다 언제나 넓다는 생각을 한다.커피숍은 논 한 마지기 정도가 된다.5시에서 십분이 지나 은서는 커피숍에 들어와 약간눈을 찡그리면서 혼자 앉아있는 남자를 찾았다.혼자 앉아있 는 남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은서는 창가쪽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시력은 어느날 갑자기 떨어졌다.밤을 새워 자료정리를 한 어느 날 아침.싱크대 앞에서 파를 씻다가 세면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다보는데,막 세수를 마치고 나오는 세의 얼굴이가물가물 했다.은서는 파를 씻던 손을 그대로 들고 눈을 비볐다.파잎에 묻어있던 물방울이 그녀의 발등에 떨어졌다.다른 날 같으면 그 거리에 눈 코 입이 선명히 보일 세의 얼굴이 눈을 비비고 봐도 형체만 보였다.은서가 파를 들고서 눈을 비비며 자신을 쳐다보자 세는 왜 그러는가 싶은지 은서에게 다가왔다.세가 바로 저 앞에 다가올 때야 세의 눈 코 입이 선명해졌다.이후로은서는 어느 자리에서 사람을 찾을 때 순서를 정해야 했다.혼자만나기로 했으면 우선 그 장소에 가서 혼자 있는 사람을 찾고 그리고 나서 그 사람 을 살폈다.시력은 점점 더 나빠져 바로 저 앞에서 아는 체로 웃으며 걸어오는 이를 못 알아보고 지나가게 되었을 때,사정을 모르고 그 쪽에서 화가 나서 오은서씨! 불러세우며 따짐을 당하고 났을 때,이후로 은서는 엷게 웃으며 다녔다.누 구를 향한 웃음이 아니라 혹여 그런 실수를 다시 할까 싶어 늘 엷게 웃고 다녔다.혹여 못 알아 봐도 웃고 있으니상대로 하여금 인사로 받아들여지도록.
십분이 더 지났는데도 남자는 오지 않는다.남자 또한 은서를 못 알아보고 어디 다른 자리에 가 앉아있는가 싶어 은서는 일어서서 넓은 커피숍을 한바퀴 돌며 혼자 앉아있는 사람을 찾았으나혼자 앉아있는 사람은 없다.
수화기 속의 간절했던 남자의 목소리로 보아 약속을 어길 것 같진 않은데,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다 커피숍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저절로 시선이 낮에 방송국을 들어올 때 오랜만에 보았던노래하는 늙은 노인이 서 있던 자리로 옮겨진다.
무슨 노래를 부를까? 노인은 마이크를 잡고 거의 주저앉다시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피곤해서가 아니라 제스처인지 노인은 아주 천천히 접은 허리를 펴며 또 아주 천천히 마이크를 하늘을향해 쳐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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