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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45.노태우,전두환 후계구도에 노심초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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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盧泰愚대통령은 忍苦의 산물인가,全斗煥대통령이 만들어낸「작품」인가.盧대통령측은 87년6월 全斗煥대통령에 의해 후계자로 공식지명되기까지「피눈물나는 고통을 참으며 내색을 않고 이불속에서 끙끙 앓는」긴 터널을 지내왔다고 회고한다.『참는 것도 용기』라는 그의 지론대로 참아서 얻어낸,또 하나의 쟁취라는 의미다.그리고 그들은 盧씨가 당했던 무수한 견제의 고삐를 쥐고 괴롭힌 사람으로 張世東씨를 지목한다.
그러나 全대통령의 5共쪽에선 盧씨의 후계자 高地 안착에 張씨는 숨은 1등공신이었다고 주장한다.張씨가 경호실장.안기부장을 하면서 3共의 車智澈처럼 다른 마음을 먹었거나「盧대표 불가론」을 폈다면 全대통령의 선택은 달라질수 있었다고 주 장하는 사람도 있다.全대통령 주변에선 86년 許文道정무1수석처럼 盧대표 不可論을 펴놓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許수석은『몇번공.사석에서 상대해봤더니 인물 자체가 대통령감이 아니더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 적이 있다.
全대통령이 언제 盧대표를「후계」로 점찍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때문에 盧대표가 불만과 불안의 세월을 상당기간 보낸 것도 사실이다.한 예를 들어보자.
85년12월 盧信永국무총리가 三淸洞 총리공관의 별채를 신축한뒤「집들이」를 했다.그때 全대통령도 직접 찾아가 축하해주었다.
아무리 총리공관 집들이라고 하지만 대통령이 청와대밖을 나와 찾아간 것은 이례적이었다.게다가 全대통령은 그후에도 이따금 총리공관에 놀러갔다.盧총리도 당시 후계자 경쟁대열에 올라 있었고 이때문에 후계자에 관한 소문은 꼬리를 이었다.
총리공관에서 있었던 全-盧총리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盧泰愚대표진영을 긴장시켰다.당시 5共핵심 Q씨의 기억.
『全대통령의 총리공관 나들이가 3,4차례 계속되자 마음이 상한 盧대표는 어디다 말도 못하고 답답한 나머지 한강에 나가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기도 했지요.집에서는 만화책을 읽었고 측근들에게 짜증을 부리기도 했지요.全대통령도 盧대표의 이런 행적을 보고받고 있었지요.그때 盧대표가 겪은 고통은 피눈물나는 것이었을 거예요.게다가 張世東부장이 사사건건 견제한다는 얘기도 들려오지요.』 그러나 全대통령이 張부장에게『후계자문제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다양한 검토 보고서를 올리라』는 극비의 임무를 준것은 86년 가을께였다.張부장도 盧대표와 2인자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관측이 무성한 때였다.全대통령은『朴正熙대통령도 대장으로예편해 대통령이 됐고,나도 그렇고,盧泰愚대표를 또 시키면 군인이 계속 해먹는다는 비판소리가 나올수 밖에 없는데…』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全대통령은 張부장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사항을 잊지않았다.『張부장,자네가 데리고 있는 朴哲彦이는 盧대표와 친척임을 잊지말게.그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다.盧대표의 처고종인 朴씨는 그때 張부장의 제2특별보좌관이었다.朴씨는 張부장이 취임한뒤 청와대법률비서관에서 안기부장특보로 옮겨 남북문제에 관한 특별임무를 맡고 있었다.Q씨의 증언.
『全대통령은 친구에 대한 의리,퇴임후 자기를 겨냥해 몰아칠 광주문제,12.12의 거센 폭풍에 누가 책임지고 방패막이를 할수있는지의 측면,평화적 정권교체의 의미등 여러가지를 고려했지요.87년초 張부장이 올린 보고서가 거명한 후계자는 盧대표였지요.만약 張부장이 全.盧 두 동기생간의 계속 집권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을 중점 부각했으면 사정이 달라질수 있었을 겁니다.張부장은 全대통령의 심중에 제1순위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盧대표임을 알고있었고 그것을 충실히 지켜준 셈입니다.』 그러나 盧대통령진영은 張씨의 「1등공신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오히려 張부장도 후계자의 욕심을 품었으며 盧대표의 행동반경을 좁히고 견제하는데 적극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盧대표가 후계자의 위치에 선것은「대안없는 상황」에서 불가피 한 선택이었다고 믿고있다.1등공신이기는 커녕 盧대표주변을 끊임없이 괴롭혔다며 앙심(?)을 갖고있다.6共들어 張씨가 당한 핍박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張씨가 盧대표의 긴 후계자 여정에 어떤 존재로 등장했는지는 盧泰愚.盧信永.張世東 3각관계로 살펴보아야한다.85년 양金씨가일으킨 신민당 돌풍으로 인한 민정당의 2.12총선 패배는 全대통령의 집권2기 정국운영 스케줄과 권력관리 구상 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全대통령이 盧泰愚올림픽조직위원장을 민정당대표로 전면에 내세운 것도 예정보다 빠른 수순이었다.
2.12총선은 全대통령이후의 후계자 다툼을 좀더 앞당겼다고 할수 있다.盧泰愚대표.盧信永총리.張世東안기부장의 라인업은 구조상 후계문제를 첨예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全대통령은 자신이 집권하는 동안 張부장을 어떻게 부려야겠다는 복 안이 있었던듯 하다.84년10월 安賢泰준장(3군작전처장)을 경호실차장으로발령한 것은 張실장을 다른 직책으로 빼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全대통령이 84년12월 현역소장인 張실장을 중장으로 진급.예편시켜 민간인으로 근무케한 것은 다음 자리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이었다.張실장은 자신에게 주어질 다음 자리가 안기부장이라는 것을알고있었다.全대통령은 盧조직위원장을 민정당 전국구에 배치했다.
그렇지만 당초 이들을 주요 포스트에 출진시킬 시점을 全대통령은 85년 중반 내지 후반기로 생각하고 있었다.Q씨의 증언.
『85년이라면 7년임기를 야구로 따지면 6회쯤되는 시점이었죠.全대통령은 비장의 마무리 투수를 내보낼 것인지,중간계투요원을보낼 것인지 심사숙고했지요.총선전까지 全대통령은 중간계투쪽으로일단 기울었지요.權翊鉉대표에게 적어도 당을 1년 정도 더 맡길생각이었어요.와병중인 陳懿鍾총리만 경질할 생각이었지요.』 ***朴哲彦씨엔 비밀로 사실 2.12총선 직후 서울.부산에서의 실질적인 참패에도 불구하고 全대통령은 처음 구상대로 밀고 가려했고 그런 의사를 비추기도 했다.청와대비서관출신 T씨의 증언.
『權대표가 2월15일 총선후 처음 全대통령을 만났을때 대통령은 당의 골격을 유지하라고 지시했지요.총선실패에 죄송하다는 權대표에게 걱정말라면서 李源京외무장관을 총리에 앉히겠다는 의사를넌지시 피력했습니다.權대표는 아마 당은 자신이 계속 맡고 정부는 李源京총리로 집권2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돌아갔을 거예요.』全대통령은 盧信永안기부장에게도 비슷한 언질을 주었다는 것이 T씨의 증언.
『盧부장은 14일 청와대에 선거평가와 정국전망를 보고하러 가면서 사표를 갖고 들어갔지요.신당위력을 제대로 파악못한 안기부의 판단 미스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만두겠다고 했지요.그러나 全대통령은 사표를 반려하면서 계속 일하라고 했습니다 .조직이 동요하지않게 주의를 기울이라는 지시를 받은 盧부장은 다음날 전국 시.도지부장회의를 소집해 인사이동이 없을 것이라면서 선거결과에 동요말고 일하라고 강조했습니다.』 ***26面에 계속 ***25面에서 계속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서울.부산에서 신민당바람의 의미는 증폭되고 권부 내부에서도 쇄신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權대표는 대도시에선 패배했지만 원내 안정석을 확보한 이상평년작이란 이유로 버티려했지만 신민당바람에 혼이 난 서울.부산출신 의원들은 당의 면모 일신을 강력 주장했다.
李敏雨신민당총재와 종로에서 혈전을 치른 李鍾贊총무가 앞장서 백의종군론을 들고 나왔다.
여론과 당내분위기를 읽은 全대통령은 李총무를 불러 당직 전면개편 필요성을 물었다.李총무는 새로운 정치상황에 대응하기 위해당의 간판을 바꾸어야 한다며 盧올림픽조직위원장을 천거했다.
***李鍾贊도 盧씨 천거 『盧조직위원장이 총선에서 서울서대문구 출마를 고사한 탓인지 全대통령의 반응은「그 친구(대표)맡으려고 할까」라며 다소 회의적이었지요.그래서 제가 타진해 보겠다며 그길로 盧위원장을 만나 대표를 맡으시라고 건의했어요.盧위원장은 생각할 시 간을 달라고 한뒤 다음날 바로 수락의사를 표시했지요.그러면서 나와 李漢東총장한테 물러나지 말고 같이 일하자고 하더군요.』(李鍾贊의원) 全대통령은 盧위원장을 당의 간판으로 내세움에 따라 權翊鉉-李源京 또는 權翊鉉-盧信永체제로 집권2기 전반을 꾸려갈 구상을 바꿔 盧泰愚-盧信永체제로 黨政의 모양을 갖추었다.
李源京외무장관의 총리기용 구상은 盧泰愚씨의 당대표 임명으로 백지화됐다.같은 TK출신을 시킬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盧대표의 등장은 현실정치에 명실상부한 2인자 등장이라는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았다.그러나 얼마안가 그의「實勢 이미지」는 퇴색했다.
그가 당대표로 할 수 있는 일은 별것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張世東경호실장의 안기부장 발탁이 더 의미심장한 정치적 함축으로다가섰기 때문이다.
全대통령은 張부장에게 5共 후반기의 통치 마무리 중책을 맡겼음이 내외에 나타났다.
그에게 준 책무는 한방울의 누수 없는 권력관리와 평화적 정권교체의 시나리오 작성.기획이었다.
또다른 하나는 그때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남북관계를 활성화시키라는 전권 부여였다.
아웅산폭발테러로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의 해금은 88년 올림픽의성공을 위한 기반조성과 연결되는 문제였다.
권력누수 방지와 후계자 선정이란 임무를 부여받은 張부장과 盧대표와의 관계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張부장은 全대통령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盧대표의 존재를 지우려하지 않았지요.그가 3각체제의 한 축에서 盧대표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면 권력누수를 막기 위한「불가피한 악역」이었을 겁니다.張부장은 나름대로 권력누수 방지와 후계자 선정이 란 모순되는 명제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지요.朴哲彦비서관을 안기부장 특보로데려다 쓴것은 全대통령의 盧대표에 대한 모종의 시사일수 있었지요.』(T씨의 회고) 朴비서관을 특보로 쓴데 대해 張씨는『그의판단력과 논리정연함을 활용하기 위해 내가 데리고 갔다』고 회고한적이 있다.
그러나 5共출범이래 盧대표의 대권 인수를 위한 전략참모로 조심스레 뛰고 있었던 朴비서관의 활동을 알고 있던 全대통령이 그를 張부장에게 붙여준 것은 盧대표를 의식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朴哲彦기용의 속뜻 全대통령이 중간보스를 인정하지 않고親政의 고삐를 움켜잡은 상태에서 盧대표와 민정당은 무기력했다.
후계자 지명의 최종목적지 도착을 위해 정치판 한복판에 나왔지만 그는 黨인사나 정책결정에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주요 정치적 결정은 張부장이나 청와대의 몫이었다.인사는 더욱그러했다.
盧대표.盧총리.張부장.朴英秀비서실장의 고위 4인회담에서 盧대표는 가장 말이 없었다.안기부는 위상이 강화되고 민정당은 주가가 떨어졌다.盧대표가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군대시절 자기 밑에 있던 후배들의 인사 푸대접이다.
盧씨측에서는 군인사가 권력누수 방지의 프로그램속에 나온 것이며 거기에 張부장이 관련됐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소위 9.9인맥의 대표격인 李鎭三소장이 85년12월 중장진급때 高明昇소장에게 밀렸다.李소장은 79년12월 동기생중 장군 1차연도 진급자다.
盧대표가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이던 安秉浩대령은 85년 장군 1차진급에서 누락되고 부사단장으로 밀려났다.
安대령의 예리한 상황판단을 인정한 盧대표는 내무장관.올림픽조직위원장시절에도 가끔 불러 자문을 받고 있었다.
그런 인사들이 누적되면서 盧대표는 특유의 몸사리기 스타일을 계속했다.Q씨의 계속되는 얘기.
***후계자 조율 역할 『盧대표는 朴대통령이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 직면했을때 JP를 방패막이로 삼았던 정치의 비정함을 주목하고 더욱 조심했지요.한마디로 JP보다 더 인내하자는 것이었어요.때문에 張부장이 盧대표를 견제했다기 보다 盧대표가 자기 위상의 한계 를 알아서 수그렸다고도 할수 있습니다.』 盧대표와張부장의 미묘한 관계는 全대통령의 권력관리 구상에서 나왔다.
그는 임기가 끝날때까지 통치력을 확보하기 위해 후계자 문제에대해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즐겼고,그런 불투명속에 두사람은 서로오해할수 있는 관계를 유지했다.한사람은 통치권자 의도에 충실했고 다른 사람은 철저히 몸을 숙이는 처신을 했 다.
全대통령은 張부장을 후계자로 생각했기보다 후계자 선정과정에서기획.조율사의 역할을 준것 같다.
국가 정보책임자로 권력의 裏面에선 후계자 도전이 어려운 정치상황 전개로 보아 張부장을 후계자로 생각했다면 적절한 시기에 안기부장을 그만두게 하고 아예 총리로 발탁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盧대표와 張부장의 관계는 全대통령의 작품일 수밖에 없다.
〈朴普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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