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비자금/「안전지대」찾기 바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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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거의가 신정부 출범후 대비책마련/가명계좌,차명으로 이미 소액분리/달러 사재기·장부조작등 성행할듯
금융실명제가 지난 12일 전격실시된이후 기업들마다 「안전한」 비자금 은신처를 찾느라 비상이 걸렸다.
비자금은 기업마다 접대비·기밀비·사례비(리베이트) 등의 기업활동이나 기업주의 사용목적 등을 위해 회계장부밖에 따로 떼놓아 관리하는 「검은 돈」을 말한다.
대부분 세금추적을 피하기위해 「돈세탁」과정을 거친뒤 가명·차명의 형태로 관리돼 왔기때문에 실명제 실시로 기업이 예전보다 만들기도 어려워졌고 거액의 사례비를 전달하기도 쉽지 않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업의 비자금 담당자들은 『다소 줄겠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미 대책마련에 나섰다고 밝히고 있다. 실명제실시에도 불구하고 「틈새」는 있다고 말이다.
이에따라 많은 기업들이 이미 다양하고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새로운 비자금관리에 나섰고,대기업중에는 「안전지대」로 비자금을 옮겨놓은 곳도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모 대기업 기획조정실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신정부 출범이후 곧 실명제가 실시될 것으로 보고 예상안을 마련,도상연습을 마쳤으며 이 과정에서 비자금 대책도 세운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비자금 관리방법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은 남의 이름을 빌린 차명계좌. 그동안 차명·가명계좌로 비자금을 관리해왔던 일부 기업들은 차명계좌를 그대로 둔채 가명계좌만 믿을만한 사람의 차명계좌로 소액분리했다.
중견업체의 비자금관리 담당자인 A씨는 『가명·차명으로 비자금용통장 10여개를 갖고 있었는데 실명제 실시이후 매달 천여만원씩 넣는 정기예금만 법인이름 통장으로 바꿨고 나머지 차명통장은 그대로 나뒀다』면서 『가명통장은 다른 사람의 실명통장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매달 천여만원씩 들어가는 통장이 월급쟁이인 내이름으로 돼있으면 세금추적이 들어올것이 뻔해 할수없이 실명통장을 만들었으나 차명통장은 이름빌린 사람에게 사례비를 주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은행들도 어느정도는 「협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A씨는 『은행측이 가명통장을 실명으로 그대로 바꿔주기도 했고 차명통장은 은행의 묵인없이는 갖기 힘들다』며 『대신 실명제 실시이전에는 누가가도 비자금용 통장으로 거래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은행측에서 비밀유지를 위해 사장이나 비자금 담당자만이 거래할것을 요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세청의 자금추적에도 한계가 있어 일정기간을 사이에 두고 1천만원 정도의 소액을 인출하면 국세청의 감시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것이다.
또 비자금용으로 암달러·금 등 「실물자산」을 모으는 기업도 있어 한 중소기업의 B씨는 『달러·금은 관리하기가 쉬워 비자금용으로 많이 애용해 왔는데 앞으로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자금을 조성하는데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인 장부조작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중소기업을 하는 C씨는 『하청업체에 1천만원 어치의 물품을 산뒤 1천5백만원어치 산것처럼 장부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마련해왔는데 앞으로는 이에 더욱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장부조작은 리베이트를 전달하는데도 많이 이용될 전망이다. 무역업을 하는 D씨는 『거래업체에 리베이트를 온라인 송금하거나 가명통장으로 만들어줬으나 앞으로는 실제 돈을 받지않고도 가짜 세금계산서를 떼주는 것을 고려중』이라고 말했다.
가짜 세금계산서를 주면 상대방은 이것으로 세금혜택을 입기도 하고 다른 목적으로 쓴 돈에 대용하는 등 상당한 이득이 있다는 것이다.
87년 범양사건,작년의 현대중공업사건 등에서 볼수있듯이 인건비·수출입 대금조작·해외법인과의 이전가격조작 등의 장부조작은 일부 건설업체·해운업체·대기업들이 비자금을 모으는데 즐겨 써오고 있는데 워낙 수법이 교묘해 세무당국의 추적이 쉽지않은 실정이다.<오체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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