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균의 뇌 이야기] 망각의 알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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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27면

서로 죽도록 사랑했던 한 연인이 끝내 헤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에게 똑같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 수 있다. 한 사람에겐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행복한 기억으로, 다른 사람에겐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모두 잊고 싶은 불행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는 실연을 경험한 주인공의 뇌를 스캔해 사랑했던 여자와의 추억을 삭제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원하는 대로 삭제할 수 있는 시대가 과연 올까? 만약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릴까?

끔찍한 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은 감각을 느끼는 부위(그림 표시 부분)가 둔화된다.

끔찍한 기억은 장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미국 9·11테러 등의 생존자들은 대부분 불면·악몽·사회부적응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하는 정신적 장애를 겪는다. 과거의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일상 속에서 되살아나면서 불안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대형 참사에서는 구조되었으나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아직 많이 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의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뇌영상 연구의 결과가 최근 정신과 분야의 국제 학술지인 ‘스칸디나비아 정신과학회보’에 발표되었다. 참사의 생존자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진단받은 19명을 대상으로 ‘단일광자방출단층촬영(SPECT)’을 통해 뇌 내 혈류량을 측정한 것이다. 이 환자들은 시상(視床·간뇌의 뒤쪽) 부위의 혈류량이 정상인에 비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상은 후각을 제외한 청각·시각 ·촉각 등 감각신경의 대부분이 지나가는 부위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은 본격적으로 처리되기에 앞서 이 부위를 거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상이 억제되었다는 것은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포함해 외부의 자극을 덜 받아들임으로써 뇌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기방어전략’일지 모른다. 실제로 시상의 활동이 덜 억제될수록 외상을 다시 경험하는 증상이 더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은 실연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다. 무분별한 폭력과 혼란 속에 놓이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등 끔찍한 상황을 언론을 통해 접하면서 받는 간접 충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러한 아픈 기억을 빨리 잊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바람이 모아진 결과일까.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망각의 알약’이 현재 연구 중이라고 한다. 감기약을 먹듯이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약을 삼키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기억을 잘할 수 있을까를 다방면으로 연구해 왔다. 하지만 살면서 진정 필요한 것은 많은 것을 기억하는 ‘기억술’이 아니라 필요 없는 기억을 지우는 ‘망각술’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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