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의 겨냥한 “대실험”(실명경제 시대: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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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본주의체제 새 「틀」로 재구성/부세습 차단… 형평과세로 진일보/정치적 판단이 「경제상황」에 우선
정치·사회적으로는 엄청난 「변혁」이요 경제적으로는 거대한 「실험」인 금융실명제가 법 제정후 11년만에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대통령의 긴급명령이라는 수단에 의해 하루 아침에 주사위는 던져졌지만 정작 강 건너 저 쪽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태까지 우리의 정치·경제·사회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영역이 다리 건너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5·16보다 큰 영향
그간 실명제 즉각실시를 강력히 주장해온 쪽의 말대로 「정의 사회」가 성큼 다가올지,아니면 실명제 단계 실시를 주장하며 실명제의 충격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말하던 것처럼 경제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지,어느 누구도 막상 눈 앞의 현실로 닥친 실명제를 앞에 놓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실명제 실시가 경제적인 고려에서라기 보다 정치적 판단에 의한 개혁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실명제란 한마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딛고 서있는 토양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쟁기」를 대고 갈아 엎는 대수술이다.
역시 대통령 긴급 명령에 의해 충격 속에 단행됐던 과거 72년의 8·3조처(사채 동결)는 그래도 지나고 보닌 「일과성」이었다.
○정치자금도 노출
그러나 이번 실명제 실시는 후대에까지 물려줄 항구적인 체제로서의 의미로 보나,당장 정치·사회·경제에 몰고올 영향의 파장으로 보나 5·16 또는 12·12같은 정치적 변혁보다 훨씬 더 넓은 영향권을 두고두고 형성할 「융합핵」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은 경제의 핏줄이고 금율실명제는 그같은 금융거래 하나하나 마다에 주민등록증을 대조하여 기록을 남겨놓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간단하기 짝이 없는 그같은 변화 하나가 바로 경제나 사회의 체제 자체를 새로운 틀로 재구성하는 대변혁을 몰고오게 된다.
원칙에 충실한 실명제 아래에서는 지금까지의 우리 재계와 같은 부의 일반적인 세습은 기껏해야 2∼3대만에 끊기고 많다.
주식 임자의 실체가 사실로 드러나 상속세와 증여세가 법에 정해진대로만 매겨진다면 기업의 항구적인 「가족경영」은 불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실명제로 인해 비로소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같은 상황이 현실화되기만 한다면 부의 정당성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이나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억제 문제,대기업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회의 통념 등은 눈 녹듯이 사라질 수도 있다.
공직자 재산등록이나 예금계좌 추적과 같은 사후적인 방법을 굳이 동원하지 않아도 사회의 뒷거래를 상당 부분 사전적으로 막을 수 있고,정치자금의 수수도 거의 다 노출될 것이다.
또 금융자산 소득에 대한 종합과세가 이루어지면 세수가 늘고 이에따라 근로소득세를 비롯한 다른 세목의 인하도 가능해져 세제를 통한 부의 형평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중기 자금난 가중
그러나 이와 같은 실명제의 효과들이 곧바로 자본주의사회의 「형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도 이제 우리는 실명제 실시와 더불어 바로 보아야만 한다.
실명제가 관행으로 정착되어 있는 미국 등의 선진국 사회에서 갈수록 소득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바로 「실명제의 정의사회를 위한 필요 요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위와 같은 실명제의 현상적 효과들이 정치·사회적으로 감지되려면 한 세대 또는 몇 세대에 걸친 「참을성」이 요구되고 이는 다시 정권이나 국민의식의 상당한 「수준」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반면 당장 단행해 놓고 본 실명제가 우리의 경제·사회·정치 등 각 분야에 미칠 영향과 파장은 즉각적이면서도 말초적일 것이며 더구나 예측 불가능한 불안감을 그 바탕에 짙게 깔고 있다.
우선 개방과 자율의 돌이킬 수 없는 흐름 속에 전격적으로 던져진 실명제의 충격에 대해 「자본」이 어떻게 반응할 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기업의 소유 구조가 낱낱이 드러나고,그간 외형을 누락시켜오던 중소기업들의 매출이 세무당국에 다 잡힘으로써 너나 할 것 없이 과표가 하루 아침에 몇 배씩 늘어날 것이다.
제도 금융에 기대지 못하고 사채 등으로 연명하던 한계 기업들의 자금줄이 하루 아침에 철저히 끊긴 상황에서 정부가 「지원」을 한다지만 그 지원은 역시 제도권을 통할 수밖에 없어 한계 기업들은 더욱 천박한 사각지대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5천만원이 넘기만 하면 예외없이 자금출처를 밝히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인데 이 또한 단순히 「가진 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우리 주변 여기저기에서 증여세 고지서가 날아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실명제가 실시된다 하더라도 정직히 살아온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하지만 그 대다수의 정직한 사람들은 세금이나 자금출처조사 때문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길로 접어들지 모르는 국민경제 전체의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대기업주가 위장 분산주식의 노출을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소액 주주는 자신의 주가하락이 겁나게 마련인 것이다.
이번 실명제 실시의 과정이나 그 내용을 보면 정치적 판단이 경제상황에 대한 고려를 압도했음을 구석 구석에서 집어낼 수 있다.
자금출처 조사의 기준이 「5천만원」에서 그어졌고 대통령의 담화 내용이 매우 「개혁적」이며 전산화 등의 여건 미비로 종합과세를 뒤로 미루면서도 실시시기가 앞당겨졌고,또 「경기가 어느 정도 회복된 뒤에야 제도개혁에 착수한다」는 신경제의 기본골격이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점 등이 그렇다.
○신경제 골격 무시
김영삼대통령으로서는 과거 박정희대통령이 기업의 사채를 정도 이상으로 심각하게 보았던 것처럼 사정의 과정에서 비실명 예금의 심각성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파악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명제의 실시는 정치적인 판단이지만 실명제의 실행은 철저히 경제적인 고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실명경제」가 과연 어떻게 꾸려져 나갈지 이제 모든 국민은 거대한 실험을 위한 「한 배」에 탔다.
세계가 「한국의 실험」을 지켜볼 것이다.<김수길기자>
□실명제 발표날/관계자들 일정
▲김영삼대통령:오전 7시10분 관저에서 손명순여사와 조찬,오전 9시 이경식 부총리로부터 25분간 보고받음(실명제실시 관련),12시 박관용 비서실장과 오찬,오후 박 실장·박재윤 경제수석 등과 협의,오후 7시 임시국무회의 주재,오후 7시35분 특별담화 발표,오후 8시 관저에서 가족들과 저녁식사
▲이경식부총리:오전 9시 청와대 회의 참석,오전 9시 대통령에게 보고(당초 예산안 중간보고를 할 계획이었으나 실명제보고로 변경),오전 11시 과천청사 도착,12시 집무실에서 죽으로 점심,오후 4시50분 청와대 연락받고 즉시 청와대행,7시 임시국무회의 참석,7시30∼8시30분 기자회견
▲김명호 한은 총재:오전 7시20분 정상출근,12시 한은 부장들과 점심,오후 2시30분 독일정무차관 접견,오후 5시30분 임원회의에서 실명제 실시방침 통보,오후 9시 한은내 비상대책반 구성 협의차 회의주재,오후 10시30분 귀가.
▲홍재형 재무장관:오전 8시 청와대회의 참석,오전 10시 과천청사 도착,12시 과천청사 인근에서 친구와 점심,오후 4시 한국은행으로 출발,오후 5시50분까지 금통위원장실에서 한은관계자들과 협의,오후 6시 재무부에 전화로 긴급 국장회의 소집지시와 함께 청와대행,오후 7시 국무회의 참석,오후 7시30분∼8시30분까지 기자회견,9시 귀가.
▲박재윤 경제수석:오전 7시50분 청와대 출근,이후 사무실에서 집무,12시 외부 인사와 시내에서 점심,1시 청와대 도착,이후 대통령에 보고 및 박 실장과 실명제협의,오후 7시 국제회의 배석,오후 7시30분 기자회견 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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