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함.긴장감에 ‘언니들’ 빠져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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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10면

쓰릴미

‘쓰릴 미’와 ‘스핏파이어 그릴’은 막판 반전으로 뒷덜미를 얼얼하게 만드는 극적 긴장감에서도 닮았다. 무엇보다 두 작품은 뮤지컬이 연극 혹은 음악극과 어떻게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음악과 노래는 단순히 분위기를 달구지도, 조역으로 머물지도 않은 채 작품 전체를 당기고 밀며 든든히 중심을 잡아간다. 또한 노랫말의 절묘함이란! 입에 착착 감기는 개사엔 절로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뮤지컬 ‘쓰릴 미’ ‘스핏…’ 엇갈린 성적표로 본 ‘흥행 코드’

이미 막을 내린 두 작품의 흥행은 엇갈렸다. ‘쓰릴 미’가 앙코르 공연까지 이어지며 객석 점유율 90%를 훌쩍 넘기는 대박 행진을 이어간 반면, ‘스핏…’은 유료 점유율 50%를 밑돌았다. ‘쓰릴 미’가 이미 내년 공연을 예약한 데 비해 ‘스핏…’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왜 빼어난 수작인 두 작품이 이토록 다른 운명을 걷게 되는 걸까.
물론 걸작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은 작품이 ‘스핏…’ 하나뿐일까. 깊이 있는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팬들이 원망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관객을 탓하랴. 두 작품의 상반된 결과는 한국 소극장 뮤지컬의 현주소를, 또한 어찌해야 롱런할 수 있는지 명확한 ‘흥행 공식’을 제시해준다.

1.카피는 섹시하게
‘스핏파이어 그릴’은 식당 이름이다. 작품은 미국 외지의 허름한 이 식당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이 식당 여주인의 죽은 남편은 군인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그래서 당시 연합군 전투기 이름인 ‘스핏파이어’를 따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문제는 이런 복합적 함의의 제목이 관객에겐 낯설다는 데 있다.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공연계 인사들 중에도 제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건 엄청난 물량 공세를 펼 수 없고, 우선 제목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소극장 뮤지컬에선 치명적인 약점이다.

스핏파이어 그릴

마케팅도 허술했다. ‘스핏…’은 부제로 ‘한국 최초의 포크(folk) 뮤지컬’을 강조했다. “희망을 주문받는 단 한 곳” “조용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여성들의 오해와 우정” 등을 내걸기도 했다. 뚜렷한 컨셉트를 잡지 못한 채 그저 밋밋하고 잔잔하다는 인상만을 주는 선전문구였다.

이에 반해 ‘쓰릴 미’는 제목은 조금 불명확했지만 부제가 강력했다. “실제 유괴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리얼 뮤지컬”은 눈길을 끌었고, “악기는 피아노 하나, 등장인물은 남자 두 명뿐”은 궁금증을 유발했다. 여기에 동성애 코드를 강조,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했다.
아무리 다수의 관객이 아닌 마니아를 상대로 하는 소극장 뮤지컬이라도 정확한 컨셉트, 타깃 관객층에 대한 공략 등 마케팅 전략이 치밀해야 함을 두 작품은 대조적으로 보여주었다.

2. 훈남을 잡아라
‘쓰릴 미’는 뮤지컬 스타의 산실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더블캐스팅으로 나온 김무열·최재웅·이율 등은 무명에서 일약 정상급 배우로 발돋움했다. 미끈한 몸매와 깔끔한 스타일, 어딘지 세련되고 모던한 느낌. 비록 살인마지만 엘리트에다 카리스마를 갖춘 악역 ‘그’와 어수룩하고 겁 많으며 우유부단한 듯 보이나 내면에 더 깊은 용의주도함을 갖춘 주인공 ‘나’는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 부분에 여성 관객들은 열광했다. 한국 뮤지컬 주 관객층이 20, 30대 미혼여성이라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러나 ‘쓰릴 미’에 대한 충성도는 그 이상이었다. 객석의 90% 이상이 여성들로 채워졌다. 게다가 별다른 무대 세트는 없고, 악기는 피아노 한 대뿐이다. 배우들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뮤지컬 칼럼니스트인 조용신씨는 “어두운 조명에서 남성 배우들을 몰래 들여다보는,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작품”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스핏…’은 여성 세 명이 주인공이다. 자신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죽여 감옥에 갔다 나온 펄시, 남편에게 자기 주장 한번 못하는 쉘비, 아들을 잃고 고집스럽게 식당을 운영하는 한나 등이다. 사연은 있으나 보통 여성 관객이 ‘내 얘기야’라며 공감하긴 힘든 인물들이다. 게다가 남자 캐릭터에서 별다른 판타지를 찾을 수도 없다. 따뜻하고 지적이며 여운은 있으나 관객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

3. 중독성으로 무장
‘쓰릴 미’는 동성애를 다룬다. 최근의 트렌드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남녀 사랑이 아닌, 남자와 남자의 애정은 그 자체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두 사람의 내면 심리를 다각도로 다룬다. 보기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분위기는 몽환적이며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기도 한다. 어딘가 모호하고, 알 듯싶지만 ‘왜 저렇게 했을까’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불확실함이 관객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 한번 보면 또 보고 싶어진다. 제작사인 뮤지컬 헤븐 측은 “다섯 번 이상 본 관객이 500여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소극장 뮤지컬의 핵심 롱런 요소인 ‘폐인형 관람문화’의 전형인 것이다.

반면 ‘스핏…’은 정적이다. 반전이 있으나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해 충격적이지 못하다.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마지막 부분, 해피엔딩으로 다소 밋밋하게 끝나버리고 만다.
뮤지컬 평론가인 순천향대 원종원 교수는 “1990년대 후반 브로드웨이를 강타한 소극장 뮤지컬인 ‘유린타운’ ‘렌트’ 등은 대형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실험성이 돋보였다. 파격과 도전정신이 부재한 도덕적 설정만으론 진화된 관객을 붙잡기엔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 쓰릴 미=2003년 미국 뉴욕 미드타운 인터내셔널 시어터 페스티벌에서 초연됐다. 1924년 시카고를 떠들썩하게 만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숲 속에 버려진 14세 어린이의 시체. 현장에 떨어진 안경이 단서가 돼 용의자가 잡힌다. 법대 졸업생이며, 니체의 초인론에 심취해 있던 두 사람,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처드 롭이다. 작품은 둘의 관계와 살인 배경, 그리고 감옥에서의 상황 등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 스핏파이어 그릴=선댄스 영화제 최우수 관객상을 받은,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2001년 뉴욕에서 초연됐다.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고 감옥 복역을 마친 펄시가 여주인공. 그녀가 길리아드라는 서부의 작은 마을에 나타나면서 조용한 마을은 소란스러워진다. 때마침 ‘스핏파이어 그릴’의 주인인 한나는 식당을 팔 요량으로 전국적인 에세이 콘테스트를 연다. 그 사연 속에 펄시와 쉘비, 그리고 한나의 아픔과 비밀들이 하나 둘씩 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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