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달장고… 김 대통령 단안/옛 총독부건물 내역과 해체결정 안팎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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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반대도 감안 원로·학자 15명과 통화뒤 결심/86년부터 박물관… 우리현대사의 산실 “마감”
구조선총독부건물 해체결정은 김영삼대통령이 집권이후 주력해온 민족정기 복원사업의 큰 줄기에서 이뤄졌다.
김 대통령은 지난 4월 문화체육부 업무보고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최근 임정요인 유해 봉환과정을 지켜보면서 「완전해체」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해체쪽으로 결심을 굳히고도 반대의견이 만만치 않은 것을 알고 여론탐색을 계속해오다 최근 휴가를 다녀온후 사회원로·역사학자 등 15명에게 전화로 의견을 청취,이들 대부분이 『부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혀옴에 따라 전격적으로 철거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번 구총독부건물 해체결정의 배경에는 민족정기의 복원이라는 역사적 의식외에도 몇가지 현실적 정황이 작용했다. 총독부건물이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도록 지어졌다는 점,연간 2백만명의 박물관 관람객중 20%에 달하는 일본인들에게 다시금 대동아공영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왔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구총독부 건물은 해체후 이전·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건물의 보존상태가 좋지않아 복원가능한 석재가 15%밖에 되지않는데다 옮기는데이만 1천억원의 비용이 드는 등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박물관 건물의 철거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지난 91년 1월 6공정부가 경복궁 복원 10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 당시 이어령 문화부장관은 경복궁복원 계획에 따라 이 건물을 철거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장관은 이 발표와 함께 전국민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70%가 철거에 찬성했다는 내용을 함께 공개했다.
중앙박물관 건물의 철거가 발표되자 학계에서부터 먼저 터져나온 찬반 논쟁은 국민적 관심사로 번져나갔다.
철거를 찬성하는 쪽의 논거는 이 건물의 6백년 수도 서울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는 위치상의 부적합성과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로 인한 반민족·반민중·반역사적 성격을 지적했다. 이에 반해 철거 반대론자들은 좋든 나쁘든 한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보존해야 하며 건물 하나 철거한다고 해서 민족정기가 되살아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조선총독부의 건축적 미학도 이들이 주장하는 보존의 또다른 이유였다. 일본의 근대건축사 연구모임인 명치건축연구회도 철거발표 직후 노태우대통령에게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보존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 연구회는 이 건물이 아시아 근대건축사상 매우 가치가 높은 것이므로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허물지 말고 보존토록 해달라고 오사카 총영사관을 통해 요망서를 보냈다. 중앙박물관 건물은 일제시대와 현대사를 통해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산실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제는 식민정책의 총본산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1916년 공사를 시작,10년만인 1926년 10월 조선총독부 건물을 완성했다.
이 건물은 1945년 해방후 3년동안 미군정청으로 불리면서 하지중장의 집무실로 쓰였으며 미군정하의 과도입법의회도 이곳에 있었다.
1948년 5·10총선거에 의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5월30일 이 건물 중앙홀에서 역사적인 개원을 했다. 정부수립후 이 건물의 이름은 중앙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곳 중앙홀은 제헌국회는 물론 2대 국회에 들어서서도 계속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6·25가 끝난후 이승만대통령은 심하게 파괴된 이 중앙청 건물을 철거토록 지시했으나 허는 비용이 새로 짓는 비용 못지 않다는 보고를 받고는 12년동안 방치해 두고 일부 부처에서 부분적으로만 사용하게 했다.
5·16이후 혁명정부는 이 건물을 정부청사로 쓰기 위해 전면 수리에 착수,62년 11월에는 종전의 면모를 되찾았다. 이때부터 국무총리가 주인이 되면서 행정의 중심이 됐다.
중앙청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모습을 바꾼 것은 86년 8월로 당시 전두환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2백65억5천6백만원의 예산을 들여 다시 꾸몄다.<김상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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