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전국구」의 개선(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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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국구의원이 탈당하면 의원직을 자동 상실케하는 법개정 논의가 이제야 제기되는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감이 있다. 국민의 직접 지시로 당선되는 지역구의원과는 달리 소속당의 추천으로 당선된 전국구의원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당 저당 옮겨다니는 정치행태는 정치도의에도 어긋날뿐 아니라 전국구제도의 본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14대국회 들어 일부 전국구의원의 경우 공인으로서의 최소한의 명분도 없이 철새처럼 당을 바꾸어 국민의 지탄을 받아왔다. 정계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도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법을 고쳐야 할 것이다. 다만 이번에 이런 법개정 문제를 제기한 민자당이 스스로 다른당 전국구의원의 입당을 허용한 것은 이율배반적이란 생각이 든다. 정치도의에 안맞는 전국구 탈당→입당을 스스로 조장하는 셈 아닌가.
솔직히 말해 지금껏 우리나라 전국구제도는 성공적으로 운영돼 왔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5공이후엔 그나마의 취지도 못살린채 극히 타락된 형태로 운용된 것이 사실이다. 전국구 또는 비례대표제를 두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지역구만으로는 기대하기 어려운 직능대표적 성격과 전문성을 살리고,지역정치의 기반이 없는 전국적 인물의 의정참여의 길을 열고,사표를 다소나마 구제하는 취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실제 운용에 있어 여당은 흔히 대통령인 당총재의 친위부대를 국회에 심고,논공행상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 능력·자질·대표성 등은 뒷전에 밀려나기 일쑤였다. 더욱이 야당의 경우 정치자금 조달의 수단으로 의석을 경매에 부치듯 사고 파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다 보니 고위층 주변의 문제인사·무명인물·모리배따위가 원내에 진출하는 현상이 생기고 전반적으로 국회저질화·정치불신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동안 전국구 제도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심지어 폐지론이 제기된 것도 다 이런 까닭에서였다. 또 현행 전국구제도는 지역구의 4분의 1이 약간 넘는 62석을 득표비율이 아닌 의석비율로 각 정당에 배분토록 함으로써 사표를 구제한다는 비례대표제의 뜻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여야는 이번에 전국구에 관한 법개정 논의에서 전국구의 이런 실상과 문제점을 폭넓게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단순히 탈당 전국구의원의 의원직 박탈만 추진할게 아니라 전국구제도의 취지를 살리는 법적 뒷받침을 하는게 중요하다. 가령 전국구 의석의 축소문제,의석비가 아닌 득표비율에 의한 배분방식의 채택,또는 지역별 정원을 지역별 득표비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 등을 두루 검토해야 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돈 적게 드는 선거,깨끗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이 문제가 검토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단 탈당 전국구의원의 의원직 박탈이란 발상을 지지하면서 여야가 단순히 여기에만 머무르지 말고 전반적인 선거제도의 개혁을 서두르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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