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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측근 세력|당 기관 (4)|매제 장성택 "실질적 3인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당 기관의 김정일 측근 가운데 당비서 못지 않게 중요한게 당 중앙위 전문 부서의 부장들이다. 이들 중 단연 김정일의 여동생 부부, 즉 장성택-김경희가 측근으로 꼽힌다.
함북 어랑군에서 태어난 해방둥이 장성택은 군 사로청 간부 시절 이미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 시절 김경희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 결혼에 골인함으로써 김일성 일가의 또 하나의 「떠오르는 별」이 됐다.
장성택은 업무 능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예체능·어학 등 만능 재주꾼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69년 김경희와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다가 김일성 환갑이던 72년 귀국, 당 조직 지도부 지도원으로 간부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그 뒤 김정일의 친족·외가 관리나 개인 관계를 도맡아 김정일의 「대리인」격으로 활동한다.
일본의 공산권 뉴스 통신사인 라디오프레스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말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주목받기까지 그가 북한의 공식 보도 매체에 등장한 것은 단 12차례였다. 김일성 일가가 대개 그렇듯 공개 활동은 최소로 그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85년7월7일 당 중앙위 제1부 부장으로 김정일의 「만경대 물 놀이장」 시찰 동행 ▲89년6월 당 6기 16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 후보 위원 선출 ▲89년7월9일 당 중앙위 부장으로 김일성과 북한 청년 대표단 접견 배석 ▲89년12월12일 김정일의 평양시 건설 사업 지도 동행 ▲92년2월3일 김정일의 영화지도 (『민족과 운명』) 동행 ▲92년4월 김일성 훈장 수상 ▲92년6월15일 김정일의 사로청 중앙위 활동가에 대한 감사 전달 집회 참석 등이 주요 공개 활동이었다. 이 동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청년 사업 책임자라는 점과 김정일 시찰에 몇차례 동행한 점이다.
장성택의 현 직책은 노동당 청년 사업 부장이다. 간혹 「3대 혁명 소조 (사업) 부장」이라는 설도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가 3대 혁명 소조 관련 업무를 일부 맡고 있긴 하지만 이는 「청년 사업부」가 학교·사로청 등 청년 단체를 담당해 3대 혁명 소조 활동과의 중첩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그의 위상에 관한 설이 분분하다.
북한에서 망명한 외교관 고영환씨는 그가 김정일 다음의 「실질적 넘버3」이라고 지적한다. 김정일이 그에게 『믿고 의지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말할 만큼 각별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와는 달리 김일성으로부터 견제 받고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가 인물됨됨이나 능력 면에서 김정일을 능가하기 때문에 김일성이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외 통신은 최근 보도 (6월24일 주간판)에서 김정일이 장성택의 권한 남용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고 밝혔다. 최근 월남한 귀순자의 증언을 근거해 「91년 초 김정일은 중앙당 청사 내 지하 회의실에서 장성택과 주요 당 간부들을 불러모아 놓고 장성택의 비리를 조목조목 지적,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당 간부들은 장성택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꺼리게 됐고 그 스스로도 몸을 사린다는 설명이다. 그의 정치 활동이 베일에 싸여 있어 「김정일-장성택 관계 악화설」도 진위 확인이 어렵다.
김경희는 김정일의 유일한 친 혈육인 만큼 최고 측근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김일성 일가답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행동 반경이 주로 당내 활동에 국한돼 왔다.
그녀는 남편 장성택 보다 먼저 당 중앙위 위원이 됐다. 현재 당 경공업 부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전에는 당국제부 부부장이었다.
국제부 부부장 시절 외교 분야의 인사를 전담해 외교관들을 주무른 실력자였다.
지금은 김정일이 제창한 이른바 「경공업 혁명·봉사 혁명」의 선봉장 역할을 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 오극렬은 현재 당중앙기관에서의 직무는 불투명하지만 공군에서 잔뼈가 굵은 김정일 측근이다. 군에서 물러나 당기관에서 일하는데 최근 거취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는 빨치산 2세 (오중치의 아들)로 만경대 혁명 학원 1기 출신이다. 김일성 종합 대학 특설학부를 마친 그는 소련 공군 대학에 유학했다. 그는 53년 귀국, 평북 피현 비행장 편대장에 부임해 길고 긴 공군 생활을 시작했다. 60년 소련 군사 아카데미 (공군)에 재차 유학을 다녀오기도 한 북한 최고의 공군통이다.
그는 최신 군사 과학을 익힌 고급 지휘관으로 공군 현대화 사업의 주역이었다. 69년1월 김창봉·허봉학 사건 때 공군 사령부내의 이들 추종자들을 색출,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김일성으로부터 정치적 신임을 얻게된다. 67년이래 공군에서 김일성 유일 사상 체계를 확립하는데도 적극 나섰다.
그가 79년9월 총참모장으로 전격 승진한 것은 김정일의 배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지휘권을 넘겨준 것은 그만큼 신임한다는 의사 표시다.
그는 70년대 중방 김동규 사건 당시 총정치국장 이용무, 인민 무력부 부부장 장정환, 작전국장 임철, 후방 총국장 이필선 등 김정일 유일 지도 체제 확립에 반대하는 군 지도자들을 군에서 내모는데도 앞장섰다.
오는 그 뒤 순조롭게 승진해 당 정치국 위원·당 중앙 군사 위원·인민군 대장 직책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88년2월 갑자기 고령의 최광이 총 참모장에 취임함으로써 오가 해임된게 확인됐다. 그 뒤 88년4월의 임춘추 부주석 사망 때 장례 위원회 명단에서는 당 중앙 위원들 속에 이름이 열거되어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된게 확인됐다. 91년5월의 허담 당 정치국원 사망 때 장례 위원회 명단에선 부총리까지의 상층간부 보다는 하위지만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극렬의 이름이 92년4월 김일성 훈장 수여자 명단에 올라 있는 걸로 보아 여전히 건재해 있음이 틀림없다.
그의 경력과 경험, 김정일 비서와의 연계로 보아 최광 퇴임 후에 다시 총 참모장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으며 오진우 이후의 인민 무력 부장이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오극렬 정치 경력>
▲64년 공군 연대 사령관·소장
▲67년 공군 사령부 참모장·중장
▲69년 공군 사령부 부사령관
▲70년11월 5차 당 대회 중앙위원
▲71년8월 공군 사령관
▲76년 부총참모장
▲79년9월 총참모장 (80년9월 상장)
▲80년4월 당 정치 위원회 후보위원
▲80년10월 6차 당 대회 정치국 위원·군사위원 (85년 대장)
▲88년9월 당 중앙위 부장

<장성택 정치 경력>
▲85년7월 당중앙위 제1부부장
▲88년12월 당 청년 사업부장
▲89년6월 당 중앙위 후보위원
▲92년12월 당 중앙위원

<김경희 정치 경력>
▲84년2월 당 중앙위 국제부 부부장
▲87년 당 경공업 부장 (강순희에 이어)
▲88년 당 중앙위원
▲89년 당 중앙위 경공업부장

<통일부=김국후 차장·유영구-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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