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씨, 돌진하는 「전두환열차」 편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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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특전사는 68년 1·21사태로 북한의 비정규부대 실체가 드러나면서 확장된 것인데 주한미군측은 이 부대가 미군의 작전통제권 밖에 있다는 점 때문에 늘 경계해 왔고 대신 대통령에겐 믿음직한 충복이었다.
공중점프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다는 「윙」배지를 전준장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특전사출신 Q씨의 회고.
『노준장은 위관시절 미국에서 심리전 교육을 받고 돌아와 공수부대에 잠깐 있었지요. 공수부대가 체질에 맞지 앉는지 곧 다른 데로 옮겨가더군요. 그런데 다시 공수부대 지휘관이 되어 뒤늦게 점프훈련을 받는 것은 고욕이었지요. 공중점프 후 땅에 떨어져 낙하산에 질질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받는 송풍훈련을 노준장은 강당에서 편하게 받았지요. 점프훈련을 할 때 숙달된 조교인 전여단장은 노여단장과 함께 받는 우정을 보여주었지요.』
점프훈련을 할 때 노준장은 통상의 철모를 쓰지 않고 헬기조종사의 파이버를 빌려쓰고 왔다고 해서 『준비성도 좋지만 너무 몸을 아낀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조종사 파이버 쓰고->
육사시절 그는 럭비부에서 달리기를 잘했지만 몸을 사려 「아카징키」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듯 노준장은 군인으로서는 뚜렷한 특징이 없는 편이었다.
공수여단장을 했지만 특전사맨도 아니고 그렇다고 야전경력도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대위·소령시절 방첩대(보안사 전신)에서 정보장교·방첩과장을 했다.
일부에서는 방첩부대 경력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스타일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그는 중령시절 월남에서 수도사단(맹호부대)대대장을 지냈다.
영관·장군시절 노씨는 상황에 무리 없이 적응하고 매사 현상유지를 하는 축이었다.
그는 9여단 창설시 부대의 닉네임을 귀성(귀성)이라 정하고 부대원의 신조·귀성예찬·여단가 등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이미지관리에는 신경 쓰는 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소질을 십분 발휘해 자신의 8사단 21연대가와 9여단가를 작사·작곡했다.
노씨가 지휘관시절 중대장의 독단활용권을 부여하고 참모들의 의견을 존중했다고 해서 덕장스타일이라는 얘기도 들었으나 밑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답답해했다고 한다.
하나회출신 민자당의원 Z씨의 회고.

<속맘 알 수 없는 상관>
『그의 지휘기법은 밑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자신의 결심을 쉽게 표출하지 않는 것이었지요. 그런 만큼 독선적이니 하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대신 참모들은 그를 존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나쁘게 말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아 참모들과의 진솔한 관계에 허점이 있었지요. 그는 오직 전두환이란 미지를 개척하고 끌어주는 열차에 편승하면 된다고 믿는 것 같았어요.』
전·노·김복동 동기생 3인간의 관계는 3자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김복동은 전이 차지하고 있는 하나회와 11기의 선두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자의 관계를 아는 Z씨의 증언.
『대령시절 전씨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다 유리에 찔리는 바람에 아킬레스건을 다쳐 한동안 고생했지요. 그때 김복동대령은 주월한국군사령부의 보안부대장이었어요. 월남에 연대장으로 오는 전대령의 부상상태에 대해 김대령은 이세호 사령관에게 「발을 다쳐 지휘가 어려울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보고했다지요. 전대령은 김대령의 보고내용을 전해듣고 자기를 음해 한다고 흥분했지요. 그때는 매년 신체검사를 해부적격자를 가리는 치열한 경정시절이어서 술을 못먹으면 몸에 이상이 있다는 소문이 날까봐 술을 억지로 먹는 풍토마저 있었지요. 이 보고 바람에 이세호사령관의 전대령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지요. 5·17후 신군부가 이세호씨의 육참총장시절 진급비리를 문제삼아 부정부패 처벌대상에 올린 것이 이런 악연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전씨와 김씨의 갈등과 대립에서 노씨는 처남인 김씨보다는 늘 전씨 편을 들었다.
Z씨의 증언.
『노씨는 그때 전씨의 뒤를 따라가는데 충실하면 군대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 같아요. 처남·매제사이가 소용없었지요. 한번은 김복동준장이「강창성이가 나는 봐준 것 같다」고 윤필용사건을 꺼내자 노준장이 화를 내며 「내앞에서 강창성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김준장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준장으로선 전씨의 정서에 어긋나는 얘기를 듣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처남보다 전씨 호감>
노씨는 일찍부터 2인자의 처세술에 익숙한 편이었다. 그런데서 오는 스타일로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다. 좋게 보면 신중하고 참모들을 잘못 쓰면 대세를 그르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대로 전씨의 자세는 「안된다」는 충언의 소리를 듣기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만들 우려가 있었다. 대통령이 된 뒤 그런 우려는 현실로 종종 나타났다.
전씨는 군대시절부터 노씨에게 자리를 물려주면 자기의 지휘방침을 상처 내지 않고 이어줄 뿐 아니라 전임자를 격하시키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일 때 오판임이 드러났다. 그 오판은 바로 우정을 증오로 돌변시키고 말았다. <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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