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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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그런 말을 하는 엄마가 언제나 고마울 거라고 여긴다면 그건 오산이다. 물론 야단치고 주눅 들게 하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나는 가끔 그렇게 말하는 엄마 때문에 모든 것이 온전히 내 책임이 되고야 말 거라는 불안을 느낀다.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결코 인정하기 싫은 일인데, 나는 겨우 열아홉이다. 어떤 때는 엄마가 고도의 심리전으로 우리를 압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그럴 때마다 굵은 철근 같은 것이 내게 박혀 오는 듯도 했다. 왜 있지 않은가, 그 높은 건물 지을 때 높은 건물이 높이 오르기 위해 그만큼 더 어두운 땅 밑으로 처박혀야 하는 그 굵은 쇠 말이다.

참 이상하다.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책들의 유혹이 컸고, 어른스러운 옷을 입고 춤도 추러 가고 싶었다. 호프집에 가서 당당하게 맥주도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나는 것은 오직 집뿐이었다. 집에 가서 된장국에 밥을 먹고 시끄러운 동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고양이들과 침대에서 뒹굴대고 싶었다.

유치원 때였던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의식주라는 단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의식주 모두가 아주 중요한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게 이해가 안 갔다. 음식은 날마다 바꿔야 하고 옷도 키가 크면 새로 사야 하는데 집은 언제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아빠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아빠는 한참을 웃더니 대답했었다.

“위녕, 집은 중요한 거야…. 네가 학교가 끝났는데, 어디로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해 봐.”

그런 상상은 내게는 처음이었고 끔찍했다. 학교가 끝났는데 친구들도 다 자기네 집으로 갔는데 내게 집이 없다면…,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 실리는 노숙자들의 기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밤이 되어도 갈 곳이 없는 그들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끔찍할까.

“아빠한테 전화 드려라. 네 아빠 성격에 지금 전화는 못 하고 하루 종일 밥도 못 먹었을 거야. 엄마처럼 낮술을 먹을 사람도 아니니 얼마나 궁금하겠니?”
 
엄마는 내게 전화기를 내밀며 웃었다. 아빠와는 내가 그날 E시에 다녀온 이후로 거의 만나지 못했었다. 나는 좀 망설였다. 실은 아빠가 내게 먼저 전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뭐 인류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생명의 물을 구하러 간 바리데기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딸이 대학 수능을 보는데 싶어서였다. 엄마가 내 생각을 눈치챈 듯이 핸들을 꺾으며 다시 말했다.

“위녕, 진정한 자존심은 자기 자신하고 대면하는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엄마는 말끝에 응? 하는 엄마 특유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으응, 하면서 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정말 무슨 전기가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벨이 울렸다. 아빠였다.

“시험 잘 봤니?”
 
아빠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그래, 엄마랑 같이 있지?”

“어.”
 
내가 대답하자 아빠는 잠시 망설이더니 “아빠가 조만간 한번 그리로 갈게” 하고 말했다. 아빠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나는 아빠를 불렀다. 아빠가 “응?” 하고 내 부름에 답했는데 나도 실은 왜 아빠를 불렀는지 알 수는 없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말했다.

“아빠…, 고마워요.”
 
수화기 저쪽에서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빠의 마음속으로 무언가가 울컥거리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엄마가 운전을 하다 말고 미소를 띠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수화기너머 아빠를 느끼고 그리고 머릿결로 엄마의 손길을 느끼는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감정을 체험했다. 그것은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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