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세계제패(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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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계의 바둑 3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중국·일본에서의 바둑에 관한 관념은 각각 차이가 있다. 바둑을 창안한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바둑을 하늘과 땅의 이치가 담긴 철학의 개념으로 파악했고,우리나라에서는 그 오묘한 반상의 진리를 따르기는 했지만 사대부의 「신선놀음」에 머물렀다. 그것을 냉혹한 승부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이 일본이다. 그네들의 독특한 승부기질 탓이기도 하겠지만 뒤져있던 바둑의 역사를 실력으로 앞지르겠다는 의지도 작용했을 것이다. 명승부에서 이겨 시원찮은 가문이 금시발복한 경우도 있고,패배하는 바람에 전통을 자랑하던 명문가가 하루아침에 몰락한 경우도 있다. 프로바둑이 일찍이 일본에서 시작되어 성숙기에 접어든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승부」는 그 자체에만 강한 집착을 보여온 일본바둑도 중국과 한국기사들에 의해 이따금 무너지는 수모를 당했다. 첫번째가 14세때 일본에 건너가 몇년후 최고의 실력자 기타니(목곡실)를 물리쳐 파란을 일으킨 오청원이요,두번째가 70년대 후방 「목숨을 걸고 둔다」는 투혼으로 일본 바둑계를 석권한 조치훈이다.
일본 프로바둑사에 오점으로 남을만한 기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본바둑의 자존심과 자부심은 매우 강하다. 세계대회가 없던 몇년전 일본기원이 발행하는 바둑잡지가 선정한 「세계 베스트 10」에 따르면 2위의 조치훈을 제외하면 상위권을 모두 일본이 차지했고 조훈현은 6위,그리고 임해봉·섭위평 등 중국기사들이 하위에 랭크된 것이다.
하지만 몇년전부터 세계대회가 연이어 창설되면서 한국기사들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지난 3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6회 후지쓰배 세계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조훈현과 유창혁이 나란히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제 한국은 4개의 세계대회를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감격적인 것은 두사람 모두 극적인 반집승을 거뒀다는 점이다. 응씨배의 서봉수,동양증권배의 이창호(SBS 세계바둑은 단체전)와 함께 이번 결승에 오른 두사람이 한국 바둑의 명실상부한 4강이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제 다시 일본에서 「세계 베스트 10」을 꼽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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