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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당근과 채찍 전두환의 군맥 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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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대권에 야심을 가져 보지도 않았고 준비도 없었던 전두환 대통령이 어떻게 어느날 갑자기 정권을 잡아 7년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7년부터는 통치에 자신감까지 가졌고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당차게 자리를 지켰으니 말이다.

<박정희 등장과 유사>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과정과 박정희의 5·16은 흥미 있는 비교 연구 대상이다.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연상케 하는 국보위 구성, 전장군의 4성 장군 예편, 거사후 서둘러 미국을 찾아간 것 등은 박정희 등장 초기의 경험과 유사하다.
그러나 5·16이후 4년간 박대통령은 무려 일곱 차례의 반혁명 유형의 사건을 겪은 데 비해 전대통령의 5공에서는 그런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3공과 5공의 군부차이, 박대통령과 전대통령의 군부 장악상을 비교할 수 있는 주요 바로 미터가 될 수 있다.
5·16이후의 잇따른 군부내 불상사가 12·12이후에는 재현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4년제 정규 육사 출신이란 12·12의 주체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들을 똘똘 뭉치게 한 것이 전두환 리더십의 핵심이었다. 5·16은 박정희 장군과 같은 만주군 출신, 그의 육사 중대장시절 생도였던 5기생 출신, 육본 정보국 근무 때의 부하, 조카사위 김종필의 8기생 등 참여 지역·출신·계급별로 군맥이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이에 비해 전 장군을 정점으로 한 정규 육사 출신들은 일사불란함을 유지했다.
이를 놓고 12·12의 신군부측 인사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5·16은 군내에서 빛 못보고 한쪽으로 밀리던 불만 세력이 주축이었다. 그 때문에 여러 쪽에서 반격을 받을만했다. 그러나 12·12는 군내에서 새롭게 뻗어 가는 힘있는 세력들에 의해 주도돼 반발그룹이 형성될 틈이 없었고 곧 한군데로 구심점이 생겼다. 박정희 소장은 유능하고 수재였지만 군내에서는 불우했고 한직으로 밀려만 다녔다. 게다가 여순반란 사건으로 늘 사상적으로 의심받는 감시 대상이었다. 이에 비하면 전두환 소장과 정규 육사 출신들의70년대 군내 위상은 달랐다.』
전대통령은 5·16과의 이런 차이점을 누구보다 정확치 인식하고 권력 획득·유지과정에서 교묘히 활용했다. 그는 집권기간 내내 대북 관계, 국제문제 결정과정에서 군부의 의견을 존중하고 기타 여러 면에서 군의 역할과 체면을 세워주는 이른바 「군사정권」의 색채를 짙게 풍겼다. 그의 군부관리는 늘 치밀했으며 불만의 요인을 제거하는데 남다른 감각을 발휘했다.
군대관리에 있어 전대통령의 첫 번째 특징은 예측 가능한 인사를 한 점이다. 83년12월 정호용 대장의 정규육사 총장시대 개막과 함께 군단장 급까지는 대체로 자신의 앞날을 전망할 수 있게끔 배려했다. 예를 들면 정 총장 다음은 12기의 박희도 3군사령관이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13기는 최세창 1군단장이 선두로 부각되어 있었다. 적어도 12, 13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12·12사태에 대한 논공행상이 매겨져 있었다. 12·12 당시 1등 공신인 박희도 1공수여단장은 원래 장군진급에서 박준병·박세직 준장보다 한해 늦었다. 이를 전대통령이 커버해 준 것이다. 동기생 중 선두로 달려온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비하나회(거사 후 가입)로 12·12에 참여했고 평소 전 장군과는 일정거리를 두었지만 제대로 대접받은 셈이다. 5·16후 반혁명이 논공행상의 불만에서 싹이튼 데 비해 초기 12·12의 공적평가는 상당히 공정했다.
다음 14기는 이종구 수방사령관의 선두 쾌주 속에 정도영 보안사참모장의 다음 자리가 관심을 끄는 정도였다. 15기는 고명승 인사참모부장과 민병돈 20사단장이 앞섰으며 기수별로 대충 질서와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관계법 고쳐 물갈이>
전대통령이 빠른 시일 내에 군내부를 평정하고 정규육사시대 개막을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군인사법의 개정에 근거한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장군 계급정년을 대폭 단축해 단기육사 선배, 특히 종합학교출신들의 조기 전역을 유도함으로써 물갈이를 재촉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기 전역하거나 강제 예편 당하는 선배장성들이 불만을 갖지 않게끔 일자리를 마련하는데 각별히 신경 썼다. 12·12때 반대편에 섰거나 강제 전역됐던 이건영(육사7기·마사회장)·문홍구(9기·에너지관리공단이사장)·장태완(종합·한국증권전산사장)·이재전(8기·성업공사사장) 장군에게도 일자리를 주었다. 이들은 대개 지금 와서 전씨를 고발하겠다고 하지만 당시는 모두 전대통령이 준 자리를 받았었다. 물론 강제로 별을 뗀 대가의 밥벌이가 이들의 분통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박대통령의 매정함과 인정 못지 않게 전대통령도 당근과 채찍을 적절치 구사했다. 60년대 후반 반혁명사건 핵심 원충연씨(최고회의 공보실장) 가 81년 초에야 감옥에서 풀린 경우를 들어 신군부측은 12·12 반대쪽 인사들에 대한 그들의 배려와 대우가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전대통령 역시 예편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구락부(현 성우회)를 비롯, 육사의 기수별 모임, 종합출신 전우회·갑종출신모임, 해군·공군·해병대예비역 모임들을 몽땅 해체시키는 등 단호할 때는 단호했다. 재향군인회만 제외하고 어떤 군 출신 모임도 허용하지 않아 군 선배들로부터 비난받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조치는 군맥의 장악과 관리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전대통령이 아닌 누가 했어도 정규 육사 출신들을 그렇게 장악할 수 있었을까.
『육사 11기들은 생도시절부터 단기육사 선배들과는 다르다는 자부심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군 생활을 해왔지요. 그런 엘리트의식이 선배들을 비하하는 것으로 발산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심지어 선배들의 6·25전투경험까지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었지요. 신군부가 단행한 성우구락부 해체는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배장성들을 「똥별」취급한 것이지요. 이런 정신구조가 정규 육사 출신들을 저해하는 어떤 사태의 발생을 막고 일사 불란함을 유지하는데 기여했을 겁니다.』(정규 육사출신 의원Z씨)
12·12에서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기까지 정규 육사 출신들은 전두환 외에 어느 누구도 지도자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합되어있었다. 말하자면 전 장군은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리더십은 어느 날 권력을 손에 쥐고부터 생긴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쏟아 부은 노력과 정성이 결정적일 때 후배들의 충성확보로 보상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리더십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정규육사출신, 특히 하나회출신들은 저마다 전두환의 리더십에 관한 각자의 「그림」을 갖고 있다.

<리더십은 추종 불허>
『가령 1백원이 생기면 70원을 후배들을 위해 쓰고 20원은 가정을 위해, 10원은 자신을 위해 쓰는 베풂과 나눔의 생활 철학이 초급장교 때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고명승·전 보안사령관) 『후배들이 공사간에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 전대통령은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뛰어다니며 해결해주었다. 그의 후배나 동료관리에는 천부적인 정성이 배어있다』(민병돈·전 육사교장)는 회고가 대표적인 것들이다.
최근 동생(허화남)의 간첩전과기록 말소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허화평 의원의 경우 대위 때 군에서 나가야할 곤경에 처했었다. 고교를 졸업한 동생은 65년2월 일본으로 밀항한 후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67년 경북 영일군에 잠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동생이 대구고법에서 간첩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보안사에 근무중인 허 대위는 정상적인 군복무가 어려웠다. 이때 전두환 대령은 앞장서 허 대위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직후 기무사령관에서 물러난 서완수 중장의 경우 1공수 여단 대대장시절청와대 경호실 파견근무 명령을 받았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서 대대장 부인쪽의 먼 친척이 6·25 때 부역한 것이 새삼스럽게 문제된 것이다. 그러자 당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였던 전 준장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서 중령이 청와대에 근무토록 주선해주었다. 이런 문제뿐 아니라 그는 후배들의 사생활·집안사정에 이르기까지 카운슬러이자 해결사였다.<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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