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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일군/장인정신(신명나는 사회: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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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판소리 소생」 불댕겼다/「우리가락」 찾기 문화계 전반으로 확산/상업주의 떠난 각고결실 음반도 “불티”
요사이 소리꾼일가의 흐르는 삶을 담은 영화 『서편제』를 상영중인 종로3가 단성사극장 안팎은 연일 잔치마당을 벌여놓은 것 같다.
김영삼대통령부터 김수환추기경,법정스님,지식인층,무명씨,중·고생까지 줄이어 한 영화를 본 것도 우리 영화사상 처음보는 현상이거니와 한 영화가 다른 문화장르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연출을 한 임권택감독의 표현대로 『온동네에 경사가 난 것』처럼 『서편제』는 판소리와 관련된 문학·출판·방송·음반 등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고 문화적 쇼크에 강타당한 듯한 표정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잠재의식속에 묻어뒀던 한국인의 정한을 깨달으며 가슴 저 깊은 곳을 두드리는 우리 소리의 무거운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있다.
요컨대 『서편제』는 한국인에게 우리 고유의 정서를 고리로 대공감대를 형성케 하고 있는 것이다.
개봉 두달째인 6월중순 현재 관객 30만명이 넘어선 이 영화는 지금 추세라면 우리 영화사상 최다관객 동원작인 『장군의 아들』(90년 68만명) 기록을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
집체예술인 영화는 신명난 사람들끼리의 협조가 안되면 될 성질의 일이 아니다. 판소리라는 미답의 소재를 택한 『서편제』는 특히 그러해서,이 영화에는 원작자·제작자·감독·연기진 등의 신명이 곳곳에 배어있다.
영화는 대성공을 했고 지금 그들은 각자 몫의 과실을 즐기며 기뻐하고 있다.
영화의 원작인 소설집 『서편제』를 쓴 이청준씨는 난생 처음 이른바 베스트셀러작가 대열에 들어섰다.
우리 문단의 한 고봉인 이씨는 고정독자는 늘 있으나 대중적인 인기는 별로 없는 편이다.
그의 소설집중 그래도 잘 나갔다는 『별을 보여 드립니다』의 판매부수는 1만부를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래서 늘 수입이 빠듯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번 『서편제』의 열풍으로 살림 주름살이 꽤 펴졌다.
정통 순수소설가에게 수입운운은 점잖지 못한 관심이다.
그러나 소설책이 많이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소설을 읽고 이해하고 감동받는 독자들이 늘었다는 것으로 대단히 경하할 일이다.
6월초 현재 『서편제』는 약 15만부가 팔렸다. 이 부수는 그런 이씨의 모든 작품집 판매부수를 모은 것보다 앞서는 기록이다.
요즈음 이청준씨 못지않게 기분좋은 사람이 가수 김수철씨다.
『서편제』의 음악을 맡은 그는 우리 영화로는 처음으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그대로 음반에 수록해 내놓았다.
궁중 소금과 대금 연주로 만든 주제곡과 영화에 삽입된 민요·판소리로 구성된 이 판은 소설집 『서편제』의 「이변」 못지않게 활발하게 팔리고 있다.
김씨는 10년 가까이 자신의 팝음악과 국악을 접목,새로운 소리를 만드는데 몰두해 왔다.
그는 사재를 털어 이런 류의 음반을 여러차례 냈으나 번번이 실패를 맛봤다.
보통 국악음반은 첫 판을 많이 찍어야 3백장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이번 『서편제』 음반은 6월초까지 8만여장이 나갔다. 김씨가 어안이 벙벙할만한 성공이다.
국악계는 처음 『서편제』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었다.
보따리 하나 지고 남도를 떠도는 소리꾼의 삶이 너무 누추하게 그려지고 정통 소리꾼이 상업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소리꾼의 정도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연여배우인 오정해양에게 『춘향가』를 전수한 김소희씨는 오양을 파문할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영화가 완성된 후 국악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성공,우리 소리가 거리로 당당히 걸어나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드는 것을 보고 몹시 감동하고 있다.
한편의 영화가 그들이 그토록 애써왔던 우리 소리의 대중화를 선도한 것이다.
국악협회(회장 성창순)는 다음주 임 감독에게 감사패를 줄 계획이다.
『서편제』 열풍은 방송과 각종 판소리 강좌에까지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KBS­TV의 심야프로인 「국악춘추」는 최근 시청률이 두배나 뛰어오른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인기 쇼·드라마프로에 비해서는 미약한 시청률이나 구색용에 불과했던 국악프로가 대중의 관심권안에 들어온 것은 특기할 사실임에 틀림없다.
또 신문사가 운영하는 문화센터 등의 판소리 강좌에 수강생이 부쩍 는 것도 이례적이다.
중앙문화센터의 경우 6월 개강한 이번 분기 판소리 초·중급반 민요교실에 전번 분기보다 20여명 이상 더 수강생이 늘었다.
『서편제』의 대성공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장인정신의 승리라는 것이다.
장인정신은 한가지 일에 몰두하되 그것을 통해 세속의 명리를 좇지않는,말하자면 무심히 저절로 신명이 나서 일하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임권택감독은 그의 눌변이 상징하듯 소탈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일에 관한한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다.
그는 14년전에 소설 『서편제』를 읽고 영화화를 결심했었다. 그 긴 세월동안 틈틈이 각 장면을 구상하며 연기자를 찾아 나섰는데 그 집념이 오늘날 성공의 과실로 현실화된 것이다.
그는 상업적 흥행을 기피한다할 정도로 자신의 연출정신의 구현에만 충실하다. 소설가 이청준씨의 끈질긴 인간에 대한 탐구의 성과는 모든 주요 문학상 수상경력이 증거하고 있다.
그는 상업주의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병신과 머저리』 『이어도』 『조율사』 『소문의 벽』 등 그의 대표작들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인간을 둘러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의 소산물로 이른바 인기소설들과는 그 격을 달리한다.
신명이 있지 않고서는 30년을 일관되게 향기높은 작품을 써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몸짓을 해대는 신명이 아니라 그의 내부를 감싸고 도는 진짜 신명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가수 김수철씨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인기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었다.
인기가요만 발표해 돈을 번다는 것은 음악인의 정도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밤무대는 물론 TV출연마저 사양하는 원맨밴드(혼자서 모든 악기를 조화시켜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를 실험하고 김덕수패와 어울려 한국재즈를 공연하는 등 돈안되는 작업을 골라했다.
김씨는 『서편제』의 성공으로 나름대로 추구해온 국악의 대중화에 조금 기여했다며 활짝 웃는다.
『서편제』의 주연배우 김명곤씨는 스스로 재야연기자임을 자처한다.
10년전 고교교사를 그만두고 연극계에 뛰어든 그는 그의 연기방향을 오로지 민족적인 것에서만 찾고 있다.
박초월씨를 사사,판소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김씨는 『서편제』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소설을 각색하고 이어 명연기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제작자 이태원씨의 존재도 보배롭다. 그는 척박하기 짝이 없는 한국영화 관객층을 상대로 25편의 영화를 제작,한편당 평균 관객동원 17만명이라는 경이적인 「제갈 조조」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흥행에 대한 확신이 없고서는 엄두를 못낼 일이다.
또 촬영기사 정일성씨가 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카메라와 함께 청년처럼 뛰는 그를 보면 누구든 일꾼의 신바람을 느낀다.
『서편제』는 말하자면 자신의 일에 신명나 있는 사람들이 총화를 이뤄 멋지게 성공시킨 대신명의 산물인 것이다.
프로가 뭉치면 신명이 난다. 프로는 아름답다.<이헌익기자>
◎「서편제』 영상화 “황금트리오”/운좋게 마음에 맞는 제작자 만나/감독/밑질 각오로 작품성만 보고 투자/제작자/「감동의 장면」 전달에 심혈 기울여/촬영감독
정일성 촬영감독(64),임권택 영화연출감독(58),이태원 제작자(56).
임 감독의 부인인 채영씨(43)의 말을 빌리면 영화때문에 「자기네끼리 딴 살림을 차린」 우리 영화계의 황금트리오다.
백발이 성성한 이들에게는 진짜배기 프로의 자신감과 넉넉함이 물씬 풍긴다.
83년 비구니승단과 정부의 압력 때문에 불발로 끝난 『비구니』 작업때 처음 뭉친 이들은 척박한 우리 영화 풍토에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들이 일궈낸 「신화」를 연일 새롭게 증명하고 있는 「단성사」 앞에 선 세사람.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임=늘그막에 마음에 맞는 제작자를 만나 감독으로서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정 감독과 촬영을 하면 불안하지가 않아요.
정=임 감독·이 사장과 함께 일하면서 느끼는 이 행복감을 나는 그림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이=무슨 말씀을. 『서편제』만 해도 그렇지요. 기획 당시 흥행이 되니 안되니 말이 많았지만 흥행이 안되면 어떠냐고 생각했어요. 『장군의 아들』로 번돈을 작품성 있는 영화 만드는데 쓰면 그건 즐거운 투자지요.
나는 젊은 감독들과 일하면서 늘 두분 이야기를 합니다. 돈을 떠나서 인간적인 교감이 될 때 거기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임=겉으로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속으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겠지요.
두분한테 많이 배웁니다.
정=누가 할 소리. 뭣한 얘기지만 난 임 감독과 목욕을 할 때마다 임 감독이 몸을 빠드득 빠드득 닦는 것을 보고 아하 저 양반 자기 마음을 닦는거지라고 느낍니다. 보기 좋아요.
이=영화란 어차피 세상살이를 담는 것인데 우린 대화가 통하는 사이지요. 여자얘기도,세상을 보는 것도 서로 비슷해 좋아지는가 봅니다.
서로 치켜세우며 속으로는 자신의 일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하는 노장들의 대화에는 젊은이들이 새겨 간직해야 할 삶의 지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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