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스릴러 영화 ‘리턴’ 으로 돌아온 김·명·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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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김명민(36)의 극적인 스타덤은 잘 알려진 것이다. 1996년 SBS 탤런트로 데뷔 후 유망주로 떠올랐으나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촬영 중 다치거나 영화들이 자꾸 엎어졌다. 연기를 접고 호주 이민을 결심한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KBS ‘불멸의 이순신’(2004)이었다. 물론 이 역시 미스 캐스팅이란 ‘딴지’가 사라지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두 번째 스타덤은 MBC ‘하얀 거탑’(2007)이다. 대학병원을 무대로 한 권력 드라마. 그는 젠틀하고 지적이지만 양육강식의 비열한 야망을 숨기지 않는 장준혁을 맡았다. 깍듯한 인상 한 켠에 의외의 냉혹함이 또아리 틀고 있을 것 같은 그의 복합적 외모에 딱 어울렸다. 장준혁은 일본 만화 ‘시마과장’에 버금가는 ‘경쟁적 조직인간’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돌아왔다. 스릴러 영화 ‘리턴’과 함께다. 다시 영화고, 다시 의사다. 실제 촬영은 ‘하얀 거탑’ 이전인 지난해 했다. 실제 의학적으로 보고된다는 ‘수술 중 각성’(근육은 마취됐으나 정신 마취는 풀려 환자가 수술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상태)이 소재다. 이를 겪은 소년이 훗날 살인마로 변해 복수극을 펼친다. 김명민은 복수극의 중심에 놓이는 외과의사 류재우를 맡았다.

“남녀가 사랑만 하는 얘기는 낯간지러워 못합니다. 강하고 센 영화,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 기업형 조직형 드라마에 끌려요.”

그는 벌써 다음 작품을 촬영 중이다. 범죄 액션 ‘무방비 도시’다. 삼청동에서 만난 그의 안에는 이미 ‘무방비 도시’ 조대영 형사가 들어와 있는 듯했다. "영원한 인기란 없는 것. 안 되면 언제든 떠난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세월의 부침을 뚫고 탄탄하게 다져진 배우의 자존심이 느껴졌다.

Q.‘하얀 거탑’과 이미지가 겹쳐진다.

“아무래도 또 의사니까. 하지만 ‘리턴’은 좀 더 감성적인 드라마다. 살인마가 누구냐에 촛점이 맞춰지지만 바탕에는 아버지 세대가 던진 돌이 자식 세대에 돌아오는 인간의 운명적 굴레가 숨어 있다. 연기의 포인트는 ‘욕심 내지 말고 절반씩 덜어내자’였다. 남자 4명(유준상·정유석·김태우)의 유기적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각자 자기 욕심을 내는 순간 조화가 깨지는 구도였다.”

Q.스릴러나 남자들 세계를 그린 작품을 선호한다.

“왜 로맨틱 코미디를 안 하느냐고 하는데, 남녀가 사랑만 하는 얘긴 답답하고 민망하다. 그보다는 남자들의 우정·배신이 더 뭉클하다. 또 요즘은 여자들도 대부분 직장 다니는데 사랑 일색에 1차집단에 머무는 얘긴 물리지 않나. ‘조직형 기업형 드라마’가 더 현실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작품 고를 때 캐릭터의 복합성을 따지는데, 요리할 거리가 많은 복합적 캐릭터들은 주로 스릴러물에 몰려 있다.”

Q.아내를 잃고 옥상에서 자해하며 울부짖는 연기가 강렬했다. 힘든 점은 뭐였나.

“연기 자체보다 전후 준비기간을 버티는 게 힘들었다. NG를 안 냈으니 내가 찍은 분량은 기껏 20분 정도다. 그런데 이걸 30초 찍고 1시간 반 카메라 위치 바꾸고 조명 세팅하고, 1분 찍고 또 1시간 반 세팅하고 식사하고, 이런 식으로 12시간 했다. 당연히 밥도 못 먹고 혼자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배부르면 신경이 둔해지고, 먹고 떠들면 감정이 깨지니까. 슛 들어가는데 그제서야 ‘감정 잡을게요’ 할 수 없는 건 아닌가. 배우란 언제 어느 때나 슛 들어갈 수 있게 늘 준비돼야 한다. 그게 매번 제일 어렵다.”

Q.이후 일주일간 촬영도 못 했다면서.

“목이 쉬어서다. 애초부터 목이 엄청 쉴 걸 예상했고, 이후 일주일은 스케줄을 빼달라고 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돼 리얼하긴 한데 내가 봐도 참 지저분하더라.(웃음) 사람이 오열하면 온갖 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건 다 나온다. 심지어 침까지.”
Q.배역을 맡으면 극중 의상을 평소에 입고 다니는 배우도 있다. 배역과 동화되는 특별한 장치가 있나.

“그 인물의 생각, 마인드를 갖는 거다. 지금 인터뷰하면서도 간간이 조대영을 떠올린다. (자신 앞에 놓인 토마토 주스 잔과 간식 접시를 가리키며) 평소 김명민이라면 이걸 먹었을 거다. 하지만 ‘조대영은 잔동작이 없는 사람이니 안 먹을 것 같다’는 제동이 탁 걸린다. 주스도 나라면 빨대로 마시지만 조대영은 벌컥 들이켰겠지, 이렇게 잠깐 동안 조대영이 왔다 간다(인터뷰 내내 그는 주스 등에 손을 안 댔다). 이런 식으로 그 인물을 환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눈빛이 달라지고 그 인물이 내게 다가오는 거다.”

Q.그만큼 나중에 빠져나오기도 힘들겠다.

“촬영을 끝내고 한 인물을 보내는 것은 실연이랑 똑같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의 상실감, 통증이 그대로 몰려온다. ‘하얀 거탑’ 때도 꼬박 1~2달 괴로웠다. 뭘 해도 즐겁지 않고 허망하고. 차에서 ‘하얀 거탑’ 음악이라도 나오면 미치는 거다. 그러면서도 또 연기한다. 어찌 보면 배우란 일종의 정신질환을 단기간 앓는 직업이다.”
Q.‘하얀 거탑’ 후유증은 없나. 팬들의 기대치랄지, 인기에 대한 부담 말이다.

“(인기에 대해) 일부러 무뎌지려고 한다. 내가 가슴에 품은 말이 ‘중용’이다. 좋아도 너무 기뻐하지 말고 나빠도 너무 낙담하지 말자는 거다. 주변 친구들은 완전 김 빼는 스타일이라며 싫어하지만, 그건 지금껏 내가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인드 컨트롤하며 스스로 찾은 답이다. 세상에 영원한 게 있나? 언제 내가 추락할지 모른다. 그럼 그땐 그만두고 딴 일 찾으면 된다. 배우로서 지금 내 목표는 ‘무방비 도시’ 조대영만 잘 해내는 거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오면 그걸 토대로 다음 목표가 생기는 거고.”

Q.목소리와 발성이 좋은 배우로 정평 났는데, 예전엔 콤플렉스였다면서.

“처음엔 목욕탕 목소리라고 타박을 많이 받았다. 개미 소리 같은 친구들한텐 섬세하다 하고 나에겐 감정전달이 안 된다, 너무 울린다, 그러는 거다. 일 년간 속삭이는 연습을 했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트집 잡는 사람 없다. 세상사가 그런 거다. 사람의 위치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그러니까 너무 좋아할 일도 너무 슬퍼할 일도 없다.”
Q.TV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면서도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TV 탤런트는 배우가 아니라는 식의 편견은 웃긴다. TV 현장에서의 순발력·민첩성은 무시할 게 못 된다. 영화는 모든 게 배우 중심이고 배우를 위해 무작정 기다려 주니까 연기자로선 훨씬 편하다. 반면 TV는 살인적인 스케줄에 숨 가쁘게 돌아간다. 그게 배우냐 기계지 폄하하기도 하지만, 결국 배우란 어떤 현장에든 고루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또 ‘영화가 무조건 최고다’ ‘우리 영화고 열심히 했으니 봐 주자’는 식의 유난한 ‘우리 의식’도 문제다. 시장이나 산업규모만 봐도 TV가 영화보다 훨씬 크고, 못 만들었는데도 우리 영화니까 극장에 걸리는 식의 스크린쿼터도 아닌 것 같다. TV 드라마가 달라진 시청자를 쫓아 정신 차리지 않으면 미드·일드에 다 먹히는 것처럼, 충무로도 나만 옳다는 식의 아집에서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닐까.”

글=양성희 기자 <shyang@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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