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씨"군 젊어져야 한다"「물갈이」예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12월12일 밤 이희성 중장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정승화 총장의 육본 측과 전 사령관의 경복궁 그룹간의 중간위치에 있었다. 그는 당일 저녁 동기생들과 식사하다 급히 연락을 받고 남산 중정 부장실에서 양쪽에 유혈충돌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부분에 대해 육본측 장성들은『그는 초반에 진압자세를 취하다 나중에 쿠데타 그룹에 동조했다. 그 대가가 총장이었다』고 단정했다, 10·26직후 정승화 참모총장은 노재현 국방장관과 의논해 이희성참모 차장을 중정 서리에 임명했다.

<공군출신 장관임명>
그는 난색을 표시하다 현역복귀를 약속 받고서야 정보부의 수습책임을 맡았다. 때문에 육본 측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아무튼 이 부장 서리의 중립자세로 덕을 본 12·12멤버들은 거사 성공 후 그를 총장으로 밀었다.
12·12직전 육군의 지휘부는 정승화 총장(5기)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7기특)과 군사령관으로 김학단(1군·5기) 이건영(3군·7기) 진종채(2군·8기)로 포진됐었다. 경복궁에 참여한 정규 육사 11기 후원 세력인 유학성(정훈 1기) 황영시(10기) 차규헌(8기)중장이 바로 참모총장을 맡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신 군부 핵심이었던 Z씨의 증언.
『경복궁 그룹은 5기인 정 총장과 7기인 이건영 장군을 강제 퇴진시키면서 8기생에게 군의 지휘를 맡겨야 한다고 냉각했지요. 경복궁의 선임자인 유 중장은 군단장을 마친지(77∼79년)가 얼마 안됐고 황영시 장군은 기수가 아직 일렀지요. 때문에 자기들이 바로 총장을 맡으면 군의 신망을 얻기 어렵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중재역할을 했던 이희성 장군이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사령관과 이 장군은 별로 호흡이 맞지 않았지요. 그래서 황영시 1군단장을 참모차장에 앉혀 감시역할을 하게 했지요. 계엄위원회를 차장이 관장케 해 실제권한을 행사한 겁니다』
12·12그룹이 육군을 잘 모르는 공군출신 주승복씨를 국방장관에 앉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Z씨의 계속된 증언.
『노재현 장관은 12·12당시 책임 회피적 처신으로 장관에, 유임되기가 어려웠지요. 사실 노 국방과 전 사령관은 인간적으로 가까웠습니다. 전 사령관이 70년 월남(백마29연대장)에 갈 때 서종철 종장의 수석부관 자리를 노태우 대령에게 물려 주려했지요. 그런데 서 총장이 순발력이 필요한 그 자리에 군대말로 빠릿빠릿하지 않은 노 대령은 맞지 않다고 꺼렸지요. 그때 전 대령이 참모차장이던 노재현 장군한테 찾아가 「같은 노씨인데 서총장에게 잘 좀 얘기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지요. 노재현 장군이 서 총장을 설득해 수석부관으로 노 대령이 임명되게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을 제치고 국방장관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기에는 노 장관이 맞지 않았지요』,
12·12에 성공한 신 군부는 반대편에 섰던 장성들의 거세에 이어 숙군 작업에 착수했다.
자기편으로 군을 재편한 것이다. 노태우 9사단장이 수경 사령관에, 정호용 50사단장이 특전사령관에 임명돼 수도권 근위 부대가 정규 11기생들로 채워지면서 물갈이는 거칠어졌다.

<고참들 무더기 전역>
노 소장의 수경사령관 임명은 군내 계급서열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이 총장은 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참 소장급들의 퇴진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 소장의 조기 수경 사령관 임명으로 많은 장성들이 공중에 붕 뜨게 됐지요. 군의 계급과 보직의 균형을 맞추지 않고선 통솔이 곤란하다고 이 총장은 본 것이지요』(Q씨)
당시 소장급에는 육사 8기후 미, 9·10기, 11기 선두주자, 종합학교 출신 선임자, 갑종, 배속장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인사문제에 있어 12·12그룹의 의사를 이 총장에게 전달한 것은 유학성 3군 사령관이다.유 사령관의 정훈1기는 이 총장의 8기와 동기대우를 받았다. 12·12그룹에 소원했거나「김재규·정승화 라인」으로 지목된 소장·준장들은 이 총장으로부터 용퇴를 종용받았다.
강제 퇴역한 장성들의 눈에는 이 총장의 역할이 12·12쿠데타 그룹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한도 부수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국방대학원장에 천주원(9기), 육대 총장에 안종훈(9기), 3사관학교장에 정형택(8기)소장 등 고참 소장을 한꺼번에 중장으로 진급시켜 임명한 것은 이 총장의, 고심작이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 군부는 군의 세대교체라는 명분으로 전면 물갈이를 밀고 나갔다. 전사령관은 『군은 젊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다녔다. 이는 4년제 정규육사 출신으로 군을 재편하기 위한 시도였다.

<군 인사법 개정반대>
당연히 군인사법을 손대기 시작했고 장성들의 계급정년을 단축하는 묘안을 내놓았다. 이 총장은『사단장(소장)을 마치고 두 자리 정도 지낸 뒤, 군단장(중장)을 나갈 생각을 해야하는 것이 정상이다. 전력·인력손실이 크다』고 제동을 걸었지만 무시당했다. 신 군부는 이 총장이 반대하자 해·공군에 연구를 맡겼다.
군인사법 개정작업은 국보위 발족과 함께 공식화돼 80년 11월 통과되었다. 그 핵심은 계급정년을 중장 4년(이전엔 6년)·소장 5년(7년)·준장 5년(8년)으로 대폭 단축한 것. 당시 준장·소장급에 있었던 비정규 육사 출신이나 종합학교·갑종·배속 출신들은 대거 옷을 벗었다. 12·12부터 80년 말까지 육군의 전역 장성은 무려 96명이며 3분의 2정도가 물갈이 파동에 휘말린 것이다. 이 총장은 못마땅해했지만 당하는 쪽에서 보면 그의 존재는 12·12그룹과 한통속이나 다를바 없었다. <박보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