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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명 저질 시집 청소년 정서 해친다|올 상반기 베스트 셀러 10위 권 독차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우리의 시 독자, 특히 청소년층이 달콤한 말장난에 중독된 채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종로서적이 최근 집계한「93 상반기 부문별 베스트셀러 순위」에 따르면 시 부문에서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마지막이라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을 나는 알지 못 합니다』『친구의 소중함을 느낄 때』등 제목만 봐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무명·익명 시들이 베스트셀러 10위까지를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있다.
『하늘의 달빛이/호수 위에서 은빛 물결로 부서질 때/나는 말없이 당신 곁에 앉아/물위에 조약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당신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이따금 내 손을 꼭 쥐어주곤 하였습니다/라디오도 TV도 없이/그리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우리는 그렇게 있었습니다.』 가장 많이 읽힌『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의 한 부분이다.
87년 간행돼 2백만 부가 나간 서정윤씨의『홀로서기』가 빚어냈던 감성 중독증의 시 독자층들이 6년여 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시집들은 지은이·제목·내용·편집 등에서「유행상품으로서의 시집 만들기」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예외 없이 긴 제목들이 너와 나 사이의 만남·사랑·이별·그리움과 같은 사춘기적 연애정서만을 나타내고 있다. 내용도 마찬가지여서 설명적인 제목 그 자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미 지겹도록 사용해 신선할 것도, 그렇다고 의미의 확장도 노릴 수 없는 죽은 상징·비유로 말장난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장난을 청소년의 팬 시 취향에 맞춘 표지와 적당한 여백 속에 편집해 넣고 있는 게 베스트셀러시집들의 공통점이다.
또 지은이가 예반·고은 별·이 풀잎 등 하나같이 익명 뒤에 숨은 것도 특징이다. 출판사 역시 내용에 책임질 수 없는 군소 출판사가 대부분.
91년 2월에 출간돼 지난해와 올 상반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는「예반 지음 남주 옮김」으로 돼있다. 책 끝에 국적·나이도 밝히지 않고 지은이를 외국의 전 항공사 직원이라고만 밝히고 있는데 총 4백56행의 짧은 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시의 기초훈련도 안된 누군가들이 말장난을 모아 펴낸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렇게 익명 뒤에 숨어 책임질 수 없는 출판사들이 생산한 시 아닌 시들이 베스트셀러가 돼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층을 파고들고 있는 것은 커다란 문제라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시집들을 분석한 최근의 평론『탈 사회·탈 역사·죽은 은유』(『시와 사회』창간호)에서 문학평론가 오민석 교수(단국대)는『대중가요 가사와 다를 바 없는 이 같은 시집들이 점잖고 지적인 행위인 독서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뜨리며 청소년층을 파고드는 것은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오 교수는『자아와 세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문학의 덕목을 저버린 이 시집들은 극단적 이기주의·편의주의·무정부주의등 반 도덕·반인간적 의식만을 퍼뜨리고 있다』며 베스트셀러 시집의 해악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웠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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