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대 유급사태 보고만 있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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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반약국의 한약처방 조제를 사실상 허용한 보사부의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에 항의해 전국 한의대생 4천여명이 근 4개월째 수업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법정수업일수 부족으로 전원 유급될 처지에 있다. 수업일수를 채울 수 있는 시한인 이번 주말을 앞두고 24일 열린 대학별 비상총회에서도 수업거부 강행과 유급불사 입장을 거듭 결의했다. 유급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번 한의학계의 반발을 받고 있는 약사의 한방약품 취급문제는 그동안 이 문제의 주관부서인 보건사회부의 모호한 태도가 큰 원인이다. 63년 제정된 현행 약사법은 당초부터 약사의 한약취급 허용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75년 약사법 개정때 한의학계의 강력한 건의에 따라 약사들의 한방진단과 한약조제를 제한하는 내용을 정부의 권고사항으로 국회가 부대결의를 했던 것이다. 이 부대결의가 법규로 나타난 것이 약사법 시행규칙 제11조 「약국관리상의 준수사항」이다. 이 조항 7항은 「약국에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깨끗이 관리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 모호한 문장으로 돼있는 규정이 실제로 약국의 한약조제를 제한하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약국의 한약조제가 제재를 받은 사례가 없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그런데 지난 2월 정부가 이 유명무실한 조항을 삭제해버림으로써 적당히 넘어가던 문제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양·한방의 해묵은 관할 논쟁이 다시 불붙고,특히 한의대생들의 집단유급 결의로 악화되고 있다.
한방측에서는 한약조제는 전통민족의학의 맥을 이어받은 한의사들의 고유한 영역이므로 약사들은 한약을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약사측에서는 모든 약학대학에서는 본초학이나 한방개론·한약학 등 한방 관련 교과를 이수하고 있기 때문에 한약도 취급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한방측은 한방만을 6년동안 연구한 한의대 출신과 4년동안 몇몇 기초과목만 공부한 약대출신이 어떻게 동등한 한약조제권을 행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해묵은 논쟁에 대해 일부 국민들은 양방과 한방업계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관망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이는 국민의 건강과 보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4천여 한의대생들의 유급위기를 앞에 둔 보사부의 태도는 너무 한가롭고 안이한 인상이다. 한의사들에 대한 몇가지 대우나 제도의 개선안을 내놓고 받아먹고 물러가든지 말든지 좋을대로 하라는 식이다. 개정된 약사법 시행규칙의 실시를 일단 유보하고서라도 당사자들의 설득과 대화로 수천 학생들의 집단유급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 공청회 등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을 서둘러 근본적인 방안을 찾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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