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화려한 휴가' 틈타 화려한 나들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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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저는 선생님 책을 아주 많이 읽었습니다."

-뭔 책을?

"저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93학번인데, 고대 선배와 같이 자취를 했습니다. 그 선배는 '새벽광장'이라는 서클 멤버였는데 그 서클의 입문필독서 중의 하나가 '여자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저보고 읽어보라고 던져주더군요."

-그 책은 정치이념과는 무관한 책인데?

"인간은 결코 정치이념으로는 의식화되지 않습니다. 정치이념은 인간의 의식을 경직시킬 뿐입니다. 그 책을 열면 모국어(母國語)와 모어(母語)의 이야기가 나오고 랑그와 파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찔해지고 정신이 버쩍 들더군요. 그 순간 저의 상념이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의식화는 의식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나한테 받은 영향이 뭔가?

"'노자철학 이것이다'에서 말씀하신 '보편사론'이 저에겐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이었죠. 1980년 5월 18일 이후 열흘간 벌어진 사건을 광주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한 시점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것은 누구에게나 어느 역사적 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사건일 뿐이며, 따라서 지금 여기 나의 실존의 세계와 동시적 관계를 지닌다는 것이죠."

-그래도 자네 영화는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은가?

"제가 생각하는 정치는 인간의 삶일 뿐입니다. 사실 저는 선생님께 역사를 배운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배웠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된 역사로서의 광주 민중항쟁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열흘 동안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살았나, 그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지난달 29일 밤 서울 동숭동에서 기자 도올과 담소하는 '화려한 휴가'의 김지훈 감독.

-그래서 자네 영화가 인기가 있는 것 같아. 첫날 개봉관에 가보니 광주 민중항쟁을 전혀 모르는 청춘남녀들로 꽉 찼고 그냥 순수하게 웃고 울고 하는 모습들이 아름답게 보이더군. 코믹한 요소들도 참 좋았어.

"저 자신이 광주 민중항쟁을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대구 사람이고 열 살 때 그 얘기를 들었는데 그냥 폭도.불순분자들이 일으킨 사건으로만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전 서울에 와서야 전라도 사투리도 처음 들었거든요. 대학생활을 통해 그 진상을 정확한 사진.증언.비디오 자료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땐, 이미 그것은 광주의 역사가 아닌 나의 가슴속에서 피 끓어오르는 역사가 되었지요."

-더 좀 사실적으로 만들지 그랬나?

"저는 오직 영상적 해석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큐적인 복원이 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에 충실하되 어떻게 그것을 선남선녀들이 드라마적 감동으로 느끼게 만들 것인가? 오직 이런 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렇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드라마의 연기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픽션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감지하면서 자신들이 주인공과 합일되는 몰아(沒我)의 감정으로 몰입되더군요. 그들의 표정과 눈물은 우리 민족의 가장 순수한 표정이었고 눈물이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화려한 휴가를 틈타 화려한 나들이만 하려는 모리배만 설치는 것 같지 않은가?

"바로 그 대목이 선생님 같은 분들께서 바로잡아 주셔야 할 우리 역사의 당위가 아닐까요?"

-그래! 그래! 우리는 이 시점에서 분명히 화려한 휴가에 답해야 한다. 정권교체도 좋고 여도 좋고 야도 좋다. 누가 어떻게 이 나라를 이끌어가든 화려한 휴가에만은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그 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화려한 휴가를 같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 실존의 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