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여인」 익명보도의 이유/정철근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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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슬롯머신계 비호세력 수사는 금력과 폭력,그리고 권력이 어우러져 연출된 한편의 드라마처럼 전개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된지 오래다.
더구나 「모든 범죄의 이면에는 돈과 여자가 있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검찰이 슬롯머신계 대부로 군림한 정덕진씨 형제와 6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의원의 금품거래 혐의를 밝혀내는 연결고리로 독신의 홍모씨(42·여)를 찾아내 그의 진술을 법정증거로 보전하자 홍씨에 대한 세인의 궁금증은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이같은 독자의 요구를 외면한채 이 사건에서 홍씨의 역할을 보도하면서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홍씨의 사진은 물론 실명조차 거론하지 않은채 보도하는 「미련함」을 보였다.
보도이후 본사편집국에는 『중앙일보가 홍씨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왜 사진 한장 쓰지 않느냐』는 전화가 빗발쳐 당직기자들은 이를 해명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독자들의 궁금증에 대해 먼저 밝혀둘 것은 본사 취재팀도 홍씨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해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물론 취재도 충분했다.
다만 중앙일보는 보도에 앞서 홍씨에 대한 실명·사진보도가 독자의 정당한 알권리를 충족하는 것인지,아니면 단순한 흥미를 충족시키는 것인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씨는 이번 사건의 피의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를 불이익을 감수한 법정증인이라는 점이 우선적으로 고려됐으며,그의 사생활이 건전한 것이었느냐는 질문에 앞서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다」는 헌법상의 사생활 자유권과 초상권도 외면할 수 없었다.
또한 그에게 출생과정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철모르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탓에 중앙일보는 책임있는 언론으로서 신중한 보도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의 알권리란 알려질 가치가 있는 사실을 알권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알려질 가치란 건전한 상식이라는 척도로 잴 수 밖에 없는 것으로,공인이 아닌 한 개인의 직업이 사생활은 그것이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와 관계없이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인권』이라는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출신 서정우변호사의 말은 홍씨 보도에서 중앙일보가 삼은 지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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