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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중요한 역할은 과거-현재-미래 연결시키는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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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문고전 번역의 산실이었던 민족문화추진회(이하 민추)가 올 10월 ‘한국고전번역원’(이하 번역원)으로 새로 태어난다. ‘한국고전번역원법’(7월 3일 국회 통과)에 의해 설립되는 교육부 출연기관으로, 그 위상이 크게 강화됐다. 그 동안 민간법인이었던 민추를 4년 9개월간 이끈 조순(79·사진) 회장이 31일 퇴임한다. 임기는 4년이지만 법안 통과를 위해 퇴임을 미뤘던 그는 홀가분한 심정이라고 했다.

 “단지행호사 막요문전정(但知行好事 莫要問前程:다만 좋아하는 일을 행할 뿐이니 앞으로의 일은 굳이 묻지를 말라).”(당나라 말기 학자 풍도(馮道)의 시 ‘천도(天道)’중)

 조 회장은 위 시구를 퇴임의 말로 대신하고 싶어했다. 번역원 법안 통과까지가 자신의 임무라고 선을 그었다. “제 나이도 있고, 저보다 젊고 시대의 흐름을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번역원장을 맡아 잘 이끌었으면 합니다.”

 그는 민추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민추에선 장기적인 번역 계획을 세울 수 없었어요. 매년 교육부를 찾아 보조금을 타서 연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취임 때부터 관심은 직원들의 실력 향상과 처우 개선이었습니다. 번역원 출범으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조 회장은 고전 번역을 국가 사업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국가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과거-현재-미래를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민추는 그런 기능의 일부를 수행해 왔어요. 우리의 과거가 다 좋다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우선 지나온 길을 알자는 거지요. 그걸 알아야 정체성이 잡혀요. 번역원은 민추의 사업·재산·인원을 승계합니다. 달라진 것은 종합적 마스터플랜을 세울 수 있게 됐다는 점이죠.”

 그는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는 도산서원 원장(1993~95)도 지냈다. 한학의 대가인 이우성(82) 선생과 함께 지난 25년간 한시 쓰기 모임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경제학자가 되기 전 어려서부터 선친에게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경기중학을 다니던 1944년엔 학교를 그만두고 1년 넘도록 집에서 한학만 배우다 해방 이후 복학했다.

 “한학은 저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생각하게 해주는 밑거름이었죠. 그런데 너무 한국적인 유교에 국한해 보는 데는 동의하지 않아요. 한학도, 유학도, 편협해선 안 됩니다. 공자란 분이 편협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를 거쳐 서울시장, 민주당 및 한나라당 총재, 15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이력이 화려한 그는 정치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그 사람(제자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후보로)나왔으면 지지해줬겠지만…. 차선책은 별로 생각 안 해봤어요. 정치 쪽은 관심을 끊었습니다.”

배영대 기자, 이유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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