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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하늘, 땅, 사람이 하나인 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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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면

 대통령의 휴양지인 청남대를 둘러보고 대청호를 끼고 도는데 ‘벌랏 한지 마을’이란 이정표가 눈에 띕니다. 무엇에 홀린 듯 차를 돌렸습니다. 생판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이름에 발길이 저절로 내달았습니다.

 산굽이를 구불구불 돌아 한참을 달리니 첩첩산중의 옴폭한 곳에 자리를 튼 아담한 산골마을이 나타납니다. 충청도이건만 강원도 산골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키 큰 미루나무 길을 따라 내려가 마을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집에 이름표가 걸렸습니다. 마당이쁜집, 다무락집, 들뫼풀집, 골목안집, 자연송이벌꿀집, 화가의집….
 각각 다른 모양의 나무로 만들어진 이름표들은 정겹고 예쁩니다. 솜씨 또한 여간 빼어난 게 아닙니다. 필경 화가의 솜씨겠다 싶어 식전 댓바람부터 ‘화가의 집’ 문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은 화가(이종국·45)는 품에 안은 세 살배기 아들에게 그림을 그려 줍니다. 그의 아내는 옆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바라봅니다.

 오붓한 그들만의 세상을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온 불청객이 반가울 턱이 없을 텐데, 십년지기 대하듯 환한 웃음으로 맞아 줍니다. 손수 만들어 내온 오디차와 따뜻한 양젖만큼이나 구수한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화를 전공했어요. 이 마을이 예전에 한지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사라져가는 한지를 살려낼 욕심으로 여기에 눌러앉은 지 10년이 넘었어요. 한때는 이곳이 삼천 냥 마을로 알려졌었죠. 잡곡 천 냥, 과일 천 냥, 한지 천 냥이라 해서 삼천 냥이죠. 하지만 한지의 용도가 줄면서 명맥이 끊기고, 과일나무도 베어낸 지 오래죠. 예전에 60가구가 넘던 마을이 이제는 고작 서른 가구도 안돼요. 마을이 해체되면 우리 삶의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지를 재현해내고 이를 토대로 전통 테마마을을 꾸렸습니다. 세상은 자연이든 사람이든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죠.”

권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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