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고… 우리수출 큰 호재안된다/이석구동경특파원(특파원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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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원자재 대부분 일 의존… 오히려 불리할 수도
『엔고가 우리에게만 적용되나요.』
엔고 덕으로 우리나라 수출이 잘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수출상사들의 대답이다. 엔고로 일본의 수입가격이 싸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동남아국가들에도 똑같이 적용돼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섬유 등 우리의 수출주력상품은 동남아 후발개도국에 점점 밀리고 고급제품은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상품과 경쟁할때 엔고는 일본의 가격경쟁력을 약화시켜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분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원자재를 대부분 일본에 의존하는 우리의 산업구조로 볼때 엔고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면이 크다.
지난달 일본의 수입상황을 보면 일본시장에서 한국상품이 얼마나 밀리고 있는가가 잘 나타난다. 일본통산성 발표에 따르면 3월중 일본의 수입은 총 2백12억3천만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9.4%가 증가했다. 이 가운데 아시아 신흥공업국(NIES)으로부터 수입은 9.6%,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으로부터 수입은 15.4%가 각각 전년동기보다 증가했다. 반면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은 5.3% 증가에 그쳤다.
이 자료를 보면 우리는 NIES나 아세안의 대일수출 증가세는 물론 일본의 전체수입증가세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대일 수출 주종상품은 철강·섬유·수산물·반도체 등 전자제품이다. 이 가운데 반도체·철강을 제외한 다른 품목들은 후발개도국과 기술수준이 종이 한장차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이 불황에 시달리는 탓으로 반도체·철강은 수출증가를 기대할 수 없다.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는 전자레인지·컬러TV·VTR·자동차 등 새상품을 개발해 미국·유럽 등지에서 크게 히트했다. 한국은 「하면 된다」는 정신하에 똘똘 뭉쳐 세계시장을 누볐다.
엔고로 일본이 주춤하고 후발개도국은 아직 우리와 기술격차가 있던 80년대 후반 한국은 연 1백억달러 이상의 무역흑자를 내기도 했다. 이는 잇따른 히트상품의 개발과 가격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후 이렇다 할 히트상품을 내지 못하고 임금은 크게 올랐다. 반면 일본은 기술개발 등으로 엔고를 극복하고 후발개도국은 우리와 기술격차를 좁혀왔다. 그 결과 연간 1백억달러의 흑자에서 1백억달러의 적자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서양인들로부터 『한국인들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비아냥마저 받게 됐다.
H상사 동경지사 S부장은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를 전자레인지 하나를 놓고 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전자레인지는 기술상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첨단기술을 요하지 않아 한때 수출에서 일본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기술개발을 하지 않고 곶감 빼먹듯 기존기술만 써먹고 있는 사이 일본은 기술개발로 우리제품과 비교도 안되는 고급전자레인지를 만들어 우리가 따라올 수 없게 멀리 달아나버렸다.
일본은 이미 지난 88년에 달러당 1백엔의 엔고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임금이 싼 동남아를 비롯,미국·유럽 등 해외에 부품 및 완제품생산공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글로벌화 전략과 국제분업으로 엔고를 극복하고 무역마찰도 피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이전도 함께 이뤄지는 해외생산기지 후보지에서 한국을 제외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임금이 싼 것도 아니고 미국 공장처럼 무역마찰을 줄이는 역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살길은 기술개발뿐이다. 질좋은 물건을 값싸게 만드는 길 이외에 방법은 없다. 일본시장이 까다롭긴 하지만 질좋은 물건은 팔리게 마련이다. 섬유산업이 한물갔다지만 프랑스·이탈리아제 고급의류가 일본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이제 몸으로 때우던 시절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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