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의장 사퇴 국회 표결/민자 반란표 막기 “발등의 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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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야표에 8표만 가세해도 실패/진무에 고심… 당 지도부 “밤잠 못잘판”
노정객 박준규국회의장이 21일 의장공관을 떠났다. 30년 정치인생의 화려한 말미를 구겨놓고 떠나던 이날 의사당내 공관의 벚꽃은 유난히 화사했다. 날씨와 꽃탓일까. 박 의장의 표정도 의외로 밝았다. 야당으로 정치에 입문,여러 공화정에서 여당의 양지를 밟아온 그의 모습에는 여유같은 것마저 보였다.
박 의장은 일단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낸듯했다. 그는 자신의 의장직 사퇴처리와 의원직고수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지향점과 명분만은 분명히 했다. 그는 의장으로서 불명예로 퇴임하는 피해를 입법부에 주지 말아야한다는 의무감을 강조했다. 자신의 의장직사퇴를 「입법부의 불명예」로 해석했으며 그 불명예를 벗기위해 버팀목을 찾고 있음을 내비쳤다.
○본인은 「무죄」 자신
대세에 밀려 비록 의장직 사퇴의사는 표명했지만 불명예를 벗기위해 뭔가 석명절차를 밟겠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신상발언을 할 것이냐고 묻자 『정상적으로 하자면 신상발언을 해야하는 것 아니냐. 법절차를 지키는게 새시대 질서에 맞는 정신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신상발언을 하고 자신의 사퇴에 관해 표결로 동료의원들의 의견을 물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국회의 자정노력에 기대를 걸며,윤리특위에서 조사한다면 적극 협조하겠다』는 말로 자신의 「무죄」에 자신감을 보였다. 아울러 『의원직사퇴는 생각해보지 않았다』며 사퇴를 종용하는 민자당 수뇌부의 뜻을 분명히 거부했다. 하지만 『국가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 누구를 비난하는 폭탄선언보다 「의회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선에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는 석명내용을 준비중임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26일 열릴 임시국회는 개회 첫머리에서 박 의장 사퇴건을 표결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듯하다. 자진 사퇴를 종용해온 민당으로서는 표결을 무사히 끝내야한다는 부담을 안게됐다.
의장직사퇴처리는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이 필요하다. 결원 3석을 빼면 재적은 총 2백96명이며,과반수는 1백48명. 현재 민자당의석(1백56석)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만 문제는 비밀투표에서 불거져 나올 수도 있는 반란표의 가능성이다. 우선 민주당이 이동근의원 구속을 「의회탄압」이라며 「석방결의안」 채택을 주장하고 있어 박 의장 사퇴에 집단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간단치 않다. 여기에 재산공개과정 등을 통해 불만을 갖고 있는 민정·공화계가 8표 이상 가세해 버리면 의장직사퇴는 부결된다. 박 의장이 합법적으로 의장직을 되찾아갈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되면 김영삼대통령의 개혁드라이브는 치명타를 입게된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위해 민자당 지도부는 지금 의원들을 만나 다독거리기에 분주하다. 김영구총무는 『잠 못자게 생겼다』면서도 반란표 가능성에 대해서는 『본인이 사퇴의사를 밝힌 이상 굳이 이에 반대하는 표가 나오겠느냐』고 희망섞인 전망을 한다. 일부에서는 『재산공개 등 개혁정책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고,박 의장이 평소 위기를 관리할만큼 인덕을 쌓거나 동지를 규합하지 않겠다』며 반란 가능성을 부인한다. 박 의장은 의장직표결에서 명예를 지킨다고 해도 앞날이 순탄치 못할게 뻔하다. 그는 계속 화약고과 같은 존재가 되며 시련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권수뇌부는 박 의장이 의원직까지 사퇴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부분 의원들은 이런 사정을 알고 있고 박 의장의 「연명」이 가져올 정치권의 풍파를 두려워한다.
우선 당총재인 김영삼대통령의 의지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정상적 정치활동의 손발이 묶인 5공시절 민주산악회를 이끌며 북한산을 등반하던 길에 구기동 등산로입구에 높고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박 의장 저택을 보고 『저게 그사람 집이냐』며 놀란 적이 있다.
○연명땐 풍파걱정
김 대통령은 당시 한때의 동지였다가 여당으로 변신,유신말기 자신의 의원직 제명을 주도한 여당(공화당)의 당의장이었던 박 의장을 생각했을 것이다. 박 의장은 그 이후에도 민정당대표,6공의 국회의장으로 있으면서 늘 「중립」을 표방한 반 YS입장이었다. 다시 말해 박 의장은 천신만고끝에 정권을 얻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때 기득권·특권층의 상징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김 대통령은 여러차례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경고성질책을 해왔는데 박 의장과 같은 사람 등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버티면 어떡하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여론의 질책과 대통령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버틴 박 의장이다. 의원직을 안내놓겠다고 버틴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버틴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물의를 빚고 의장직을 떠난 사람이 의원직을 가지고 있다는게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며 「명예」를 위해서도 흔쾌히 「의원직마저 내놓는 결단」이 있기를 바랐다. 당장 박 의장이 의원직을 내놓게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여론과 언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있는 정권이 뿜어내는 시대적 압력을 구시대의 한 정치인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두보 볼 일이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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