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재산공개 실무총책/민정계출신 개혁첨병 권해옥(의원탐구: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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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가장 괴롭고 바빴던 6일”/8대부터 끈질긴 도전… 13대에 원내 첫발
□권해옥의원 약력
▲경남 합천(58) ▲건국대 법대 졸업 ▲국제신보사 기자 ▲문화방송상임감사 민자당원내부총무·정책위부의장·제1사무부총장 ▲13,14대 의원
권해옥 민자당 제1사무부총장은 정치판의 태풍을 불러일으켰던 민자당의원 재산공개의 실무총책이었다.
그는 지난 3월말 재산공개심사특위위원장을 맡았던 6일간을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괴롭고 바빴던 기간」으로 기억한다.
재산공개가 있었던 바로 다음날부터 그는 하얏트호텔에 비밀 캠프를 차려놓고 트럭 한대분에 해당할만한 방대한 자료 속에서 매일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동료의원의 정치생명이 걸린 일인만큼 종이쪽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수 없다.
가장 괴로운 악역은 동료의 정치적 사형을 선고하는 메신저가 될수밖에 없을 때였다고 한다.
박준규국회의장을 공관으로 찾아가 「결단」을 촉구했고,유학성·김문기·임춘원의원을 비밀리에 만나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정동호의원에게는 육사동기이자 특위위원이었던 민태구의원이 찾아가야 문제를 쉽게 풀 것이라는 생각에서 민 의원을 대신 보냈다.
권 의원이 민주계가 아니라 민정계출신이면서도 수많은 민정계의원들이 정치생명을 잃거나 영향력을 상실하는 개혁의 와중에 유난히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을 받는 것은 이색적이다.
그가 이같은 중책의 적임자로 꼽힌 첫째 이유는 민정계출신답지않게 상대적으로 「청빈」하다는 제1덕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가 공개한 재산총액은 6억7천만원에 불과했다. 말썽많던 골프나 헬스클럽 회원권 하나도 없다.
그의 정치경력 자체도 개혁의 실무자격에 어울린다. 그의 정치경력은 그가 인연을 맺어온 「당대의 거물」을 통해 읽을수 있다.
오지인 경남 합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배경에는 3공초 정계의 거물이었던 고 서정귀씨가 자리잡고 있다. 서씨는 박정희 전대통령과 대구사범동기라는 인연으로 정계와 재계에 두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3공초의 거물이다.
63년 건국대를 졸업한 정치지망생이었던 청년 권해옥은 서씨와 절친했던 고향 합천출신 정길영의원의 소개로 서씨를 알게된다. 그 인연으로 서씨가 국제신보사(부산의 국제신문 전신)사장으로 취임할때 기자로 특채된다. 다시 서씨가 정유회사인 흥국상사를 만들어 사장으로 취임할때 그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마침내 권 의원은 71년 서씨의 도움으로 36세의 나이에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공천을 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젊은 혈기만으로 당시 야당의 거물이었던 이상신의원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8년 10대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선전했다. 당시 중선거구였던 합천­의령­함안지역중 합천에서는 가장 많은 득표를 해 고향사람들은 그를 「합천국회의원」이라 불러주기도 했다.
그가 두번째 인연을 맺은 당대의 거물은 동향이었던 전두환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새마을운동협의회회장이었다. 권 의원 자신은 5공의 피해자임을 주장한다. 11대 총선에 출마하려고 하는데 5공 정부가 10대에 출마했던 「구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출마 자체부터 막아버렸다고 원망한다. 5공 정부는 당시 대통령의 고향인 합천에는 참신하고 유능한 인물을 내세워야한다는 판단에서 유상호부장판사를 공천했다.
권 의원은 대신 국영기업체인 한국자동차보험의 전무자리를 얻었다. 권 의원 자신은 『5공 정권의 강압에 으레 따르는 사탕발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전회장과 가까웠기 때문에 얻은 자리라며 부러워한다.
권 의원은 끈질긴 정치집년에도 불구하고 5공 정권의 서슬에 12대에도 출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치적 권토중래를 위해 수시로 고향을 찾아 유권자들을 만나고 인사했다. 마침내 그가 진짜 기회를 포착한 것은 세번째로 6공초 김윤환의원을 만난 것이다. 정치판에 관심을 가지면서 알게된 김 의원의 추천으로 13대에 민정당 공천을 얻었다. 오래 공들여온 지역기반이 있었기에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평생의 소원을 풀었다. 그가 민정계중 가장 먼저 YS지지쪽의 노선을 잡은 신민주계로 분류되는 것도 허주(김 의원의 호)계라는 계파와 무관하지 않다.
이같은 그의 정치경력은 학창시절부터 『30대에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정치집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스로의 표현처럼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자 하는」집념은 금배지를 달고부터 「일에 대한 집념」으로 나타났다.
3당합당직후 초선의원으로 부총무,이어 14대에서는 정책위부의장,새정부출범후에는 제1사무부총장으로 정당의 주요업무에 대한 실무총책의 경력을 쌓았다.
맡은 일을 충실히 처리하는 능력과 일에 대한 집념,그리고 신민주계라는 정치적 색깔까지 어울려 재산공개파문처리의 적임자가 된 것이다. 지역구관리에도 남못지않아 당직을 맡으면서도 매주 한두차례씩 지역구를 찾았으며,경남에서 예산 적기로 유명했던 합천군을 예산서열 상위권으로 올려놓은 것도 그가 자랑하는 정치성과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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