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지원 실적요구에 난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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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기계금형 제작업체인 ㈜대성엔지니어링의 노승보사장(51)의 하루는 자신의 하루가 아니다.
회사가 아닌 자기를 위한 시간은 단 한시간도 없었다.
오전7시30분 경기도광명에 있는 집에서 차를 몰고 부평에 있는 회사에 도착하면 바로 18명의직원을 모아놓고 그 날의 생산회의 겸 조회를 연다.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사무실로 올라와 잠시 숨 좀 돌리려하면 거래처 등 관계회사들의 전화가 쏟아진다.
팩스를 주고 받고, 원하는 금형을 만들기 위한 설계를 하다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공장사무실에서 직원과 함께 식사하는 동안에도 직원들은 작업공정이나 부품품질문제등 온통 회사이야기만 꺼낸다. 오후내내 손수 영업에 나서 뛰다가 들어와 8시쯤 퇴근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도 회사에서 들고 온 도면이나 기술서적을 밤늦게까지 뒤적인다.
어떤 때는 『내가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 건가』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힘든 생활을 「자기사업」이라는 성취감보다 그 어려웠던 창업과정을 뚫었다는 사실로 위안한다. 회사창업을 결심한 것은 지난 91년. 주위에선 『젊은 사람도 어려운 창업을 어떻게…』라며 혀를 찼지만 그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숨돌릴 틈 없는 현장>
한양대공대중퇴후 금형·금속업계에 뛰어들어 수십년동안 기술로 잔뼈가 굵었고 전에 있던 회사에서 상무까지 맡았던 탓에 기업물정을 훤히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리한 사업확장탓에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현재처럼 창업지원책이고 뭐고 없던 7O년대에 작은 금형회사를 창업해본 경험도 있었다. 그는 재도전을 위한 아이템을 자신의 전력에 걸맞게 당시 상당량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전자동 런치프레스용 특수금형에서 찾아냈다.
그의 능력을 아는 고급기술자들도 속속 모였다.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창업지원자금을 타내기 위한 준비도 착실히 이뤄졌다.
그러나 어려움이 없다면 이상했다. 이 특수금형의 영어이름이 공구(Tool)로 표시돼 있는 점 때문에 진흥공단관계자들이 시작부터 난색을 표하고 나왔다. 규정상 공구는 지원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외국업체에 백방으로 연락한끝에 금형임을 입증해주는 관련서류를 겨우 건네받아 간신히 진흥공단에서 2억여원의 지원결정을 받아냈다. 그는 다음으로 담보없는 유망 중소기업을 위해 대신 보증을 서주는 기술신보를 찾았다. 결과는 문전박대. 『기술이나 사업성부족이 이유라면 차라리 낫죠 . 막 창업한 중소기업보고 예년 사업실적을 가져오라고 하는 거예요. 사업실적이 없으면 신용평가를 할 수 없다나요.』
그는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던 신용보증기금쪽을 두드려 보증을 받기에 이르렀지만 은행에서 또다시 난관에 부닥쳤다. 「꺾기」를 요구한 것이다.

<배짱으로 버틴 꺾기>
『은행돈도 아니고 정부돈을 내주는 건데 웬 꺾기냐』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주위에선 그냥 응해주라고 했지만 그럴 돈도 없어 그 무서운(?)은행에 배짱좋게 그냥 버텼다. 결국 두달후 돈이 나오기는 했다. 『요즘은 나에게 창업을 문의하는 전화도 가끔 옵니다만 마땅히 해 줄 말이 없어요. 무턱대고 하라고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 경험만 가지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지난해 4월 시멘트·철강등 건자재 무역업체인 ㈜선유실업을 세운 김세용사장(36)도 노씨처럼 제조업은 아니지만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경우.
아무리 확실한 주문을 따내도 무역거래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은행은 신용장 개설때마다 담보를 요구했고 생산업체는 단가인하를 요구하는 현실앞에서는 아무리 종합상사 직원출신인 그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운좋게 1백억원짜리 거래를 따냈을 때도 담보없이 신용장을 열어주는 은행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거래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할 수 없이 재력있는 종합상사를 중간에 끼워넣으려 했을때 종합상사측은 『어차피 안될 것, 우리에게 아예 거래실적까지 넘기고 수수료만 몇 푼 받아가라』는 반응까지 보였다.

<종합상사서 눈독도>
창업 4개월만에 첫 거래실적을 쌓은 후 이제는 2천만달러어치의 무역거래까지 어엿이 성사시키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김씨는 당시 신규무역업체 등록조항에 차라리 「이미 얼마이상의 무역거래실적이 있을 것」이라는 조항이 없는 것이 이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난해 국내에 설립된 중소기업체(법인)는 약 5천6백개. 지난해 경기가 어려웠다고 해도 하루 16명씩의 진짜 사장님이 쑥쑥 생겨난 셈이다. 『그만큼 창업하기가 좋아진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창업을 해본 사람들은 『이처럼 전년도 실적등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실적을 내놓으라는 등 창업과정에서 없어서 당한 설움』을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토요일 오후나 월급날의 설렘을 영원히 포기할 것』을 주문한다.
창업만큼 힘든 일이 없기에 창업자에게 보내지는 사회의 기대도 그만큼 크고 긍정적인 것이다. <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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