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모델 따르자니 … 카르자이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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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23일 카불에서 모하메드 자히르 샤 전 아프간 국왕의 별세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 인질 석방을 위해 한국 정부 대표단과 대화 채널을 계속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불 로이터 AP=연합뉴스]


탈레반 무장세력들이 수감 중인 동료 23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한 한국인 인질 23명의 운명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레반 죄수를 풀어 줄 권리를 가진 사람이 카르자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조중표 외교통상부 제1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8명의 한국 대표단이 22일 카불에 도착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이 카르자이 대통령을 예방하고 협조를 요청한 것이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21일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전화해 "아프간 정부가 깊은 관심을 갖고 인질의 조기 석방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말했다.

탈레반 대변인을 자처하는 카리 유세프 아마디도 "한국 정부는 아프간 정부에 탈레반의 요구에 적극 응하라고 압력을 가해야 한다"며 카르자이 대통령이 열쇠를 쥐고 있음을 시사했다. 결국 그가 한국인 인질과 탈레반 재소자 맞교환을 수용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그의 고충도 보통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인질 구출에 소극적이었다간 한국을 비롯한 유엔으로부터 "자국 국민을 도우러 간 외국인들의 생명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탈레반의 요구를 받아들여 탈레반 죄수를 풀어주는 '이탈리아 모델'을 따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는 3월 탈레반에 납치된 이탈리아 기자 한 명을 석방하기 위해 탈레반 수감자 5명을 풀어줬다. 그러면서 "단 한 번뿐인 거래"라고 못 박았다. 당시 미 국무부 숀 매코맥 대변인은 "테레리스트와 협상해 미국과 동맹국의 입지를 흔들었다"며 카르자이 대통령과 로마노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번에 한국인 인질을 석방하기 위해 탈레반 수감자를 풀어줄 경우 탈레반의 인질 납치가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다.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또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프간 정부 내부의 반발과 카르자이 대통령을 후원해 온 미국의 비난까지 가세하면 취약한 권력 기반이 더 위축될 수 있다. 그는 2004년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아프간 남부와 동부는 탈레반의 활동이 활발하고, 북부와 서부에서는 군벌의 입김이 강해 입지가 약하다. 외신은 그의 이런 불안한 입지에 빗대 "카불 시장"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한국 정부는 카르자이 대통령을 압박할 카드가 거의 없다. 한국군은 이미 연말까지 철수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로서는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수용할 큰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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