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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카드로 납치 활용

중앙일보

입력

중앙SUNDAY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한국인들이 몇 명이냐, 납치 단체가 누구냐는 보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인들을 납치한 탈레반은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인 납치 사실을 뉴스로 소개했다. 자신들의 활동상을 소개한 속보 형식의 ‘지하드(聖戰)의 목소리’ 코너에서 “어제(19일) 이슬람 에미리트 전사들 (Mujahedin of Islamic Emirate)이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가던 외국인 22명을 가즈니주 카르바흐에서 체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은 303형 버스를 타고 있었다”고도 했다. 명의는 카리 유수프 아마디 대변인. 전날 AP통신에 전화를 걸어 “한국군이 21일 정오(한국시간 오후 4시30분)까지 철군하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밝힌 인물이다. 한국 정부와의 접촉이 시작될 즈음인 이날 오전에도 두 번째로 같은 경고를 했다. 아마디는 홈페이지에서 “그들을 어떻게 할지는 이슬람 에미리트 지도부가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납치가 정통 탈레반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은 듯하다. 최근 아마디가 독일인 인질 사건은 물론 지난 3월 납치됐다 석방된 이탈리아의 대니얼 마스토로자코모 기자 사건에서도 대 언론 창구를 맡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납치된 지역 인근에 주둔 중인 미군 역시 이런 정보를 우리 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23명의 외국인을 체포해 안전 지역으로 이송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탈레반 웹사이트 보도문

2002년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의 공격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탈레반은 아프간과 국경을 접한 파키스탄 지역으로 흩어졌다가 지난해 ‘피의 부활’을 선언하고 반전을 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1994년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뒤 남부 칸다하르주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탈레반 조직을 창설한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와 파키스탄 내 와지리스탄에 거점을 둔 ‘와지리스탄 이슬라믹 에미리트’의 지도자 물라비 잘라루딘 하카니를 이번 사건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와지리스탄은 2006년 9월 파키스탄과 평화협정을 맺은 뒤 사실상 독립국 형태로 탈레반의 대 나토 공세를 지원하고 있다.

하카니는 탈레반 몰락 전 각료로 일한 지하드 핵심 사령관이다. 오마르는 현재 파키스탄과 아프간 접경 지역에 은신하면서 테러를 막후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이 홈페이지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슬라믹 에미리트’(1994년부터 2001년까지 탈레반이 부른 공식 국가명)라 하지 않고 ‘이슬라믹 에미리트’라고만 한 것도 두 조직 사이의 연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정부는 탈레반 측이 한국군 철수를 내걸면서도 아프간 고위 지도자 2명의 석방을 요구해옴에 따라 피랍 한국인 안전보장을 최우선시하면서 가즈니 주정부 등을 상대로 간접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이 5년 만에 세 불리기에 나서면서 납치를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만큼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실제 탈레반은 3월 이탈리아 기자를 납치해 석방하는 대가로 수감된 지도자 5명을 돌려받았다. 뉴욕대 국제협력센터 버넷 루빈 국장은 “5년 만에 부활한 탈레반은 보다 정교한 전략을 쓰고 있다”며 납치와 대민 감성 정치를 대표적 예로 들었다.

하지만 탈레반은 이중적 행태를 보여왔다. 21일에는 한국인과 함께 억류돼 있던 독일인 토목기사 2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내걸었던 독일군 철군 요구를 독일이 묵살하자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실제 2005년 이후 탈레반은 최소 10명 이상의 외국인을 살해했다. 탈레반은 이탈리아 기자를 석방하면서도 카르자이 정부가 협상을 거부한 아프간 통역사와 운전사는 살해해 주민들에게 친서방 카르자이 정부에 대한 반감을 자극했다.

한국인 석방이 본격화할 경우 아프간 정부의 운신의 폭이 크지 않은 점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아프간 정부는 지난 3월 이탈리아 기자를 석방하기 위해 탈레반 지도자 5명을 풀어주면서 국제사회로부터 십자포화를 받았다. ‘테러범과의 타협은 없다’는 원칙을 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한국인과 함께 억류된 독일인 두 명이 살해돼 탈레반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부는 1900명의 전투병이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군 등과 달리 한국의 동의·다산 부대가 대민 활동을 위주로 한 소규모의 공병ㆍ의료 부대란 점을 적극 부각하고 있다.

동시에 동의·다산 부대가 연말까지 계획대로 철군한다는 점을 내·외신을 통해 거듭 강조했다. 여기에는 4월 3일 탈레반이 프랑스인 구호단원 2명을 납치한 뒤 프랑스군 2000명의 철수를 요구한 데 대해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철군 가능성을 시사하자 두 명이 풀려난 전례를 밟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깔려 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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