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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관념 변했지만 음란물 기준 바꿀 때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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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13면

MBC 제공

인터넷에 들어가보자. 성인용 영상물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케이블TV 성인채널을 켜보자. 기존 영화나 드라마 이름을 패러디한 성인용 비디오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포털업체 ‘야동’에 잇따라 유죄 선고한 사법부

“죄 없는 자여! ‘야동 순재’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매체와 시대변화에 따라 ‘성인물’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변화에 따라 ‘음란물’ 판정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법원과 검찰은 요지부동이다. 1999년 7월 서울고법은 재미 누드모델 이승희씨의 전면 나체사진을 인터넷에 게재해 기소된 사건에서 “체모가 드러나 있다”는 이유로 음란물로 봤다. 6년의 시간이 흐른 2005년 7월 대법원은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미술교사 김인규씨가 알몸사진 등을 홈페이지에 올린 데 대해 “보통 사람의 성욕을 자극해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쳐 성적 도의관념에 반한다”고 했다. 지난 2월에는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95년 음란물 선고를 받은 ‘즐거운 사라’ 등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검찰에 의해 약식기소됐다. 10여 년 전 구속까지 당했던 마 교수로선 200만원의 벌금형에 그친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런 점에서 포털업체들의 ‘음란물’ 재판은 일찍부터 관심을 끌어왔다. 사건의 발단은 2005년 3월 검찰이 NHN과 다음커뮤니케이션, 야후코리아 등 포털에서 유료로 서비스한 성인용 동영상을 음란물로 보고 일제 단속을 벌이면서다. 포털 업계가 검찰 약식기소에 반발해 정식 재판에 넘겨졌다.

이 재판은 포털업계 쪽의 ‘승산’이 적지 않았다. 문제의 동영상은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18세 관람가’ 판정을 받은 비디오물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란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받고자 하는 포털 업계의 의지가 강하다는 점, 그리고 그 의지를 뒷받침할 자금력이었다.

“성 표현물에 대한 일반인의 의식이 과연 어떤지를 보여주자.”

포털 업계는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에 의뢰해 대규모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방식도 획기적이었다. ▷‘18세 관람가’ 극장상영물 ▷기소된 성인물 ▷성기 노출 장면이 있는 포르노물을 한 편씩 골라 각각 2분 분량으로 편집한 뒤 전국 5대 도시 1001명(남성 499명, 여성 502명)에게 보여줬다. 설문 문항도 법원의 음란물 가이드라인에 정조준했다. 대법원 판례는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에 따라 ▷일반인의 성욕을 자극해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지를 따지고 ▷예술성을 통해 성적 자극을 완화시켰는지를 본다.

조사 결과는 포털 쪽에 유리하게 나왔다. 참가자 중 60.8%가 재판 대상인 성인용 동영상을 보고 “성적 흥분 효과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척도인 성적 수치심에 대해 41.3%가 “느끼지 않는다”고, 31.9%가 “그저 그렇다”고 답했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응답은 26.8%에 그쳤다. 형사처벌 여부에 대해선 79.3%가 “청소년에게 보여주면 처벌해야 하지만 성인의 경우까지 처벌할 필요는 없다”는 데 동의했다.

NHN과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이 조사 결과를 해당 재판부에 냈다. NHN측 김기중 변호사의 변론요지서는 “법원이 건전한 성풍속을 지켜야 한다는 지사적 신념으로 성 표현물을 엄격하게 통제해왔으나, 의식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성의식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1997년 ‘이승희 누드집’과 1999년 ‘O양 비디오’ 파문에 이은 연예인 누드집 발간 붐을 꼽았다. 또 케이블 TV의 성인채널 편성표 1주일치를 변론요지서에 실었다. ‘황홀해서 아침까지’ ‘발기해서 생긴 일’ ‘무허가 빨간 방’… 성인 채널 방송물의 표현 수위가 기소된 영상물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독일처럼 청소년 유통만 금지하는 ‘소프트코어 포르노’와 성인에게도 금지하는 ‘하드코어 포르노’로 나눠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드코어는 ▷폭력성·강제성 있는 성관계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수간(獸姦) 등의 묘사를 담고 있는 영상물을 말한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형사6단독 이동근 판사는 지난달 27일 NHN과 허모(34) 팀장에 대해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음란물 유포죄를 적용해 각각 벌금 800만원을 선고했다. 형사13단독 최정열 판사도 지난 10일 다음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역시 벌금 800만원을 선고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性)관념이 상당히 개방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일반 보통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지 않고 시청할 수 없는 음란물에 해당한다.” (이 판사)

“영상물 전체를 보았을 때 모든 점을 검토해 이뤄지는 규범적 개념이지, 발췌한 특정 장면에서 실제로 성적 수치심을 느끼느냐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므로…” (최 판사)

‘18세 관람가’ 등급 분류에 대해서도 음란성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관은 영등위가 아니라 법원이란 점을 분명히 밝혔다.

김기중 변호사는 기자와 만나 “법원 시각만 바뀌면 되는데... 법원이 기존 판례를 고수하면 결국 ‘검찰에서 걸면 걸리는 식’밖에는 안 돼요”라며 강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한 판사는 익명을 전제로 “현행 법률에 따라 음란물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고, 독일식으로 규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국회 입법의 문제”라고 했다.

형사정책연구원 김은경 박사는 “이번 판결을 적용하면 온라인뿐 아니라 케이블 TV 등 문제될 곳이 수두룩하다”며 “법원 판결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청소년들의 접근이 쉽다는 포털의 특성이 감안된 것 같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포르노나 ‘몰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이지만, 또한 그런 현실 때문에 음란물 기준을 더욱 고수할 수밖에 없는 게 법원의 입장이 아닐까.

법원의 잣대가 달라지지 않는 한 '야동 순재'가 보는 동영상은 법적으론 '음란물'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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